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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김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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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성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성구 호 : 덕휴/팔오헌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641년(인조 19) 출 생 지 : 봉화읍 석평리 상세설명 자는 덕휴‚ 호는 팔오헌‚ 본관은 의성‚ 1641년(인조 19년) 봉화읍 석평리 범들이에서 진사 추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도량이 넓고 남달리 영특하여 불과 12세의 나이에 공자대 요론순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22세에 생원시험에 합격‚ 29세에 식년문과의 갑과에 장원급제를 한 뒤 성균관 전직의 벼슬을 제수받고 처음으로 관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외직에 있을때는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하였고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또 선생은 당쟁의 와중에서 불편부당 어떤 파당에도 속하지 않고 관계의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은 고립의 상태였으나 청빈과 진실을 생의 지표로써 자조자립의 이념이 담긴 여덟 수칙을 지키며 그것을 자호로 팔오헌이라 칭하며 스스로 실천하는데 정진하며 자손들과 후학들에게도 여덟가지의 수칙을 실천하게 하였으며‚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발양하며 국가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헌을 왕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으므로 관직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직으로 기용되어 정국 수습을 위한 상소문을 올렸으나 서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저지되고 오히려 제주도정의 현감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제주도에서 불평없이 세상의 그릇됨을 뉘우치며 백성위주의 선정을 베풀며 주민들에게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함양하며 위민복리에 힘을 기울여 영세불멸의 목민관으로 추앙받았다. 그후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받았으나 가사 정리를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향리로 돌아와 여덟가지 수칙을 실천하며 후학배양을 하고 있으니 숙종은 다시 선생을 소환하여 성균관의 대사성에 임명하고 청백리에 녹선하였다. 근대화의 선구자인 선생은 1707년(숙종 33년)에 67세를 일기로 천명을 다하였으며 실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청렴한 청백리로 현대에 이르도록 추앙받고 있다. 저서로는 팔오헌문집‚ 남천록 등이 전하며 백록이사에 배향되어 오고 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 영남인물고‚ 팔오헌문집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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