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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남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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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남씨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남씨시 활동시기 : 삼국시대 상세설명 신라 경덕왕 때 축산면 축산항 해안에 풍랑으로 인하여 파선이 된 듯 배는 보이지 않고 한 조각 판자를 타고 표류하던 두 사람이 고기잡이 나갔던 어부들에 의해 발견되어 육지로 옮겨졌다. 두 사람은 심한 파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의식이 없었다. 어부들은 그들을 극진히 간호하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더니 며칠 후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죽음에서 깨어난 듯 사방을 둘러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여기가 어디이며‚ 어떻게 되어 여기에 와 있게 되었는지를 물으며‚ 감격에 넘쳐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어부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의 내력을 이야기하였더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 여기에 오게 하였으며 당신들은 우리 두 사람의 생명의 은인이니 이 은혜 무엇으로 갚아야 될지 알 길이 없다며‚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행동이나 말하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표류되어 온 까닭을 물은 즉‚ 우리 두 사람은 당나라 여남이 고향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명을 받아 일본에 안염사로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함께 탔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저 사람은 나의 아들로 먼 일본국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따라왔다가 이런 일을 당하였으며‚ 배가 부서져서 침몰할 때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정신을 차려 살펴보았더니 아들이 한 조각의 판자에 의지하여 표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물에 뛰어 들어 아들을 부둥켜안고 만리 타국에 아비를 돕기 위해 따라 왔다가 같이 죽게 되었으니 이 판자로는 두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적으니 아비는 죽어도 좋으니 너만은 살아야 한다고 하며‚ 아들은 아버지가 사시고 저는 죽어도 좋다며 부자가 서로 죽을 것을 결심 한다. 정신을 잃고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오다 여러분이 우리 부자를 구해 주었으니‚ 이 은혜 하늘같이 높다며 지내온 일들을 말하였다. 이 말을 들어부들은 이 사실을 고을 원님에게 알리니 원님은 즉시 와서 부자를 위로하고 지내온 일들을 자세히 물은 즉‚ 우리는 당나라 사람이며 나의 이름은 김 충이라 하며 아들은 김석중이고 당 안렴사로 갔다가 돌아오 는 길에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말했다. 원님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김 충 부자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다. 김충 부자는 기골이 장대하고 학식이 뛰어났으며‚ 모든 행동이 남달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갔을 때‚ 전후 일들을 자세히 말씀 드리고 우리 부자가 신라 땅에서 생명을 건졌으며 후한 대접을 받았으니‚ 이 은혜 하늘과 같으니 대왕께서 이 곳에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시면 우리 부자를 구해준 인심 좋은 곳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살겠다고 간청하였다. 왕은 김충 부자를 극진히 대접하고‚ 당나라의 현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김충 부자는 평소 짐이 아끼고 사랑하던 신하이오나‚ 신라인들의 구원을 받아 구사 일생으로 살아났다니 반가운 일이며‚ 본인들이 그 곳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어찌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신라에서 살도록 해 달라는 소식이 왔다. 김충 부자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목숨을 구해 준 축산항에 와서 살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은 남쪽에서 왔다하여 남의 성을 내리시고 시호를 영의공으로 봉하시고 영양을 식읍으로 주어 살게 하였으니‚ 이 분이 남씨의 시조이며 이름을 민이라 고쳤다. 영의공은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슬하에 삼형제가 있었으니 맏아들 홍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양을 계승하였으며 둘째 아들 군보는 의영남씨의 시조이며‚ 셋째 아들 광보는 고성 남씨의 시조이다. 같이 온 석중은 그대로 본국의 성을 따서 영양김씨의 시조가 된다. 영해에서 동남쪽 15리의 축산항 축산도에 영의공이 표류되어 닿은 곳이라 하여 이 곳을 이부동‚ 김이부동‚ 혹은 통사동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공의 여생을 이 곳에서 지냈다. 명절이 닥쳐오면 성의와 정성을 다하여 망제단을 만들어 고향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냈으며 또한 망향대라는 대를 만들어 이 대에 올라가 머나먼 고국 산천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정조22년에 영해와 영양에 살고 있던 많은 자손들이 공의 유덕을 길이 남기고자 유허비를 세웠다고 하며‚ 축산항 북쪽 산마루 양지바른 곳에는 자손들의 정성어린 비석이 지난 일들을 말해 주듯 동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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