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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安龍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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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안용복(安龍福)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안용복(安龍福)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어부 안용복이 지킨 국토의 막내 - 김재일/두레문화기행 회장.소설가 우리 민족을 소나무에다 곧잘 비유한다. 생태적으로 소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참고 견디는 힘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기름진 토 양에서보다 오히려 척박한 땅에서 그 생명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나무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소나무 같은 인물이 그립다. 이번 기행은 한사람의 천한 어부로 태어나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지킨 안용복의 유적을 찾아 울릉도로 떠난다. 울릉도 뱃길은 포항‚ 삼척‚ 속초에서 뜬다. 포항은 거리가 가장 멀지만‚ 쾌속선이 다니기 때문에 2시간 30분이면 닿는다. 속초에 서는 카타마란호로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울릉도는 우리나라 섬 가운데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다. 가장 가깝다는 강원도 삼척에서 긋는다고 해도 직선거리가 13 7Km나 되는 국토의 막내섬이다. 울릉도라는 지명도 중국시인 도연명이 쓴 '무릉도원'의 '무릉'에서 비롯되었다. 무릉(울릉)이란 곧 신선들이 사는 상상의 섬을 가리키며‚ '성인봉'이라는 이름도 신선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옛 문헌상 중 울릉도 이야기를 처음 꺼낸 책은 고려 때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이다. '섬 오랑캐(울릉도 원주민)가 바 닷물의 깊음만 믿고 교만하여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이찬 박이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이종이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배에 싣고 위협해 말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으리라'하니 오랑캐들이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라는 대목이다. 그 후 울릉도는 옛 문헌 곳곳에 단편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 '...숙종 때 삼척영장이 이틀만에 도착 하여 큰 돌산이 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것을 보았다. 언덕에 오르니 사람은 살고 있지 않고 그 터만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울릉도는 오랜 역사동안 사람이 살다가 말다가 했던 모양이다. 난세의 영웅 안용복 울릉도를 지킨 난세의 영웅 안용복‚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적은 도동 선착장에 서 있는 기념비 하나뿐이었다. 기념비엔 '장군'이라는 호칭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천민계층에 속하는 부산 출신의 어부였다. 당시는 동래부였던 부산 좌천동에 서 태어난 그는 젊은 날 좌수영의 능노군으로 있었다. 능노군이란 노젖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당시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 출입 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다. 1693년 능노군으로 군역을 마친 그는 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나갔다. 거기서 그는 일본의 오타니 가 문의 어부들과 부딪쳤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오타니에게 '도해면허'를 주어 울릉도와 독도근해의 어로활동을 하게 하 였다.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항의하다가 결국 숫적인 열세에 밀려 일본 오키사마로 납 치되고 만다. 18세기 일본사학자 오키시마가 쓴 <죽도고>에 따르면‚ 당시 안용복은 서른여섯살이었으며‚ 키가 작고 마마자 국이 있는 검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안용복은 오키시마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죄인 신분으로 다시 요나코를 거쳐서 도쿠가와 막부로 끌려가게 된다. 일본측 문헌인 <통항일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막부의 조사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 불과 하루 거리이지만‚ 일본 땅에서는 닷새 거리이므로 분명히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굴복된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땅이 아니라는 서계를 건네주고는 풀어준다. 일본측 자료인 <인부연표>의 당시 기록에는 안용복을 송환할 때 호송사 2명‚ 요리사 3명‚ 병졸 5명 등등을 딸 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송환 도중 나가사키에서 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다시 대마도에 90일동안 구금되고 만다. 구금에서 풀려나 조 선으로 송환된 뒤에도 그는 부산의 왜관에 50일동안 구금된다. 안용복에게 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친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동래 부 동헌으로 넘기면서 항의를 한다. 대마도주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쳐서 울릉도와 독도의 관활권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 근해로 북류하는 쿠 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울릉도와 독도부근으로 어로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인 조선 태종 때도 대마도 주는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차례 조정에 간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조선은 대마도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우리 바다로 들어오면 말썽이 생긴다는 이유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 조정은 울릉도에 농토가 없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도 정책을 써왔다. 그 틈을 타서 1618년 일본 막부가 오타니 가문에 도해면허를 내준 것이었다. 당시 노론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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