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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저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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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지
  • 출생연도
    1916 ~ 1956
  • 직업
    화가.서양화
  • 주요이력
    • 평남 평원 출신1940년 일본 문화학원 졸업1946년 원산사범학교 교사를 지냄1940~43년 일본 미술창작가협회전 수상41세 요절

알려진대로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중섭은 작품으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격정의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았던 그의 인생도 영화나 연극 등으로 꾸며져 대중을 만나기도 했다. 대향(大鄕, 혹은 소탑(素塔))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의 지주 이희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유년기부터 소질을 보였던 미술에 열중하느라 원래 목표했던 평양고보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오산고보(五山高等普通學校)로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여기서 그의 인생을 바꿔준 미술교사 임용련을 만났다. 미술교사였던 임용련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예일대,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했다)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로 졸업 후 파리에서 활동하기도 한 당시로서는 드문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중섭이 수많은 드로잉을 남긴 것도 습작을 중요하게 여긴 임용련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이후 이중섭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武藏野美術大學))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곧 이중섭은 이 학교를 그만두고 분카가쿠엔(文化學院) 미술과로 옮기게 되는데 이는 분카가쿠엔이 훨씬 전위적이면서 조선인 유학생을 덜 차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는 자유롭고 강렬한 선묘력으로 대표되는 이중섭의 조형세계가 열렸던 때로 알려졌다.

황소 3 이미지

황소 3

  • 저작자
    이중섭
    분류(장르)
    미술
  • 자유이용 만료(새창열림)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된 저작물로,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이중섭의 작품은 총 300여 점(유화와 채색소묘화 등 채색화 기준, 최근 추진된 《이중섭 카탈로그 레조네》에서는 편지화와 출판미술을 포함 540여 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작품을 보면 어린이, 소, 가족, 물고기, 게, 달과 새, 연꽃, 천도복숭아 같은 한국인 누구나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소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섭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는 ‘한국적’이라는 것에 대해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변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이중섭은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표현기법은 물론 재료 사용에 있어서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유화물감부터 수채, 잉크, 먹 등 가리지 않고 재료를 사용하는가 하면, 캔버스, 나무합판, 책의 간지, 은지(담배속지) 등도 활용했다. 또한 연필, 크레파스, 철필, 못, 송곳 심지어 손톱까지 다양한 표현 수단을 동원했다. 이렇게 볼 때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하지 못했던 시절, 궁핍함으로 인해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동원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극단까지 다다른 실험적 작업태도를 지녔다는 해석도 힘을 얻는다. 이러한 실험성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적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은지화 같은 경우 우리 전통기법인 은입사를 연상시키기도 하며, 드로잉에서는 선(線)의 유려함이 발견되고, 유화에서는 서예의 기법을 연상시키듯 선의 요동침으로 형태를 구축하기도 한다. 바로 여기서 이중섭의 작업을 특징짓는 ‘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통영에서 보낸 시절 그려진 <소> 연작이 바로 이러한 그의 작업의 특징을 극명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특별한 배경없이 오로지 소라는 대상만 존재하는 프레임에서 온순한 소가 갖는 강렬한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에너지는 면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으로만 표현되어 오로지 골격만 존재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 선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중섭 내면의 격렬함, 야만성, 고뇌와 번민은 물론 심지어 광기에 가까운 심적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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