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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보상화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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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연화보상화문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전돌은 점토로 성형되어 가마 속에서 높은 온도로 구위 만든 건축 용재이다. 예로부터 무덤이나 지상 건조물의 축조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작‚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기와와 함께 주요한 건축부재의 하나가 되고 있다. 전돌은 흔히 전벽돌 또는 벽돌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벽돌은 요즘의 블록(block)과 같이 건물의 벽체를 쌓거나 보도용으로 주로 쓰이는 데 반해‚ 전돌은 무덤이나 지상 건조물의 축조에 사용되어 그 전통이나 쓰임새‚ 형태 면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용도나 형태‚ 무늬와 크기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는데 그 기능적인 특성 때문에 여러 방면에 전용되기도 한다. 전돌은 자연 건조한 날전돌과 불에 구워낸 소성 전돌로 구분 할 수 있다. 날전돌은 점토로 성형된 뒤 햇볕이나 그늘에서 말린 것으로 세계 각지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대개 전돌이라고 하면 잘연 건조한 날전돌보다는 가마 속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낸 소성전돌을 지칭한다. 전돌은 용도에 따라 무덤을 축조하기 위한 묘전돌‚ 지상 건조물의 실내외 바닥이나 기단에 부설되는 부전돌‚ 건물의 벽이나 성곽‚ 단을 쌓기 위한 벽전돌‚ 목탑의 하단이나 전탑을 축조하기 위한 탑전돌 등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거나 그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는 특수 전돌이 있다. 그런데 부전돌과 벽전돌 등은 궁전이나 성곽‚ 그리고 사원 건축에 기능적으로 구분되어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형태에 따라 네모꼴인 방형전돌과 세모꼴인 삼각형 전돌‚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는 이형 전돌로 구분되고 있다. 우리나라 전돌은 그 표면이나 측면에 새겨진 무늬에 따라 무늬가 없는 무문전돌과 여러 가지 다채로운 무늬가 새겨진 무늬 전돌로 구분된다. 무늬 전돌은 다시 그 시문 단위에 따라 기하학무늬 전돌‚ 연꽃무늬 전돌‚ 보상화무늬 전돌‚ 당초무늬 전돌‚ 화엽무늬 전돌 등으로 세분되고 있다. 고대 동양미술에서 연화문 다음으로 널리 이용된 보상화문은 반쪽의 팔메트 잎을 좌우에 대칭시켜 심엽형으로 나타낸 장식무늬의 하나로서‚ 보상화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꽃이다. 일반적으로 보상화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8엽의 꽃을 평면으로 취급하여 연화문을 복잡화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꽃을 사횡으로 다루어 잎과 줄기를 자유스러운 형태로 배치한 것이다. 보상화문은 이미 7세기를 전후하여 사산조 페르시아의 타키부스탄 입구의 측면 부조에서 그 양식이 성립되었고‚ 또 당대(唐代)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신라와 당과의 빈번한 문물교류로 인하여 당에서 형성된 보상화문 양식이 전래되어 8세기 중엽 경에는 가장 화려하게 발전된다. 좌우대칭으로 완성된 팔메트의 꽃잎이 연속되면서 4엽에서‚ 6엽‚ 8엽‚ 10엽 등을 이룬 연화문 형태의 문양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그리스계 아칸더스(acanthus)에서 발전된 화문형식이다. 이 밖에도 서역에서 발생한 망고화 형식과 중국에서 이루어진 모란화 형식이 있다. 보상화문수막새는 전통적인 기와문양을 크게 변혁시키면서 통일신라 전시기에 걸쳐 매우 다양하게 장식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692-1번지와 그 일대에 위치한 선원사는 현재 사적 제 2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에 도읍하며‚ 당시 최고 집권자였던 최우의 원찰이자 대몽 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1245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 선원사는 법보를 봉안한 국찰로서 또 국사를 배출한 선찰로서 발전을 거듭하였고‚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될 만큼 규모가 웅대했다. 그 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원사는 태조 7년(1398) 대장경판이 한양의 지천사로 옮겨진 후‚ 아무런 기록 없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사찰이 되어 버렸다.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 학술조사단에 의해 최초 조사되었으며‚ 강화군의 요청에 따라 동국대박물관에서 조사단을 발족하여 2001년까지 6년 동안 약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강화도 선원사지에서 출토된 회흑색 경질 방형전이다. 중앙에는 1조의 원권을 두르고‚ 주위에 8엽의 단판연화문을 시문하였다. 이 연화문에서 시작된 줄기가 보상화로 이어져‚ 사방 모서리까지 가득히 장식되었다. 보상화 봉우리에는 9개의 구슬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바깥쪽에는 2조의 양각 선으로 구획을 형성하였으며‚ 그 외부에 당초문이 장식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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