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석파행서

추천0 조회수 29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석파행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며‚ 정치가였고‚ 서화가였다. 그의 호는 석파‚ 영조(英祖)의 현손으로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불우하게 지냈으나 철종(哲宗)이 후사가 없음을 기회로 조성하(趙成?)를 포섭하여‚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后)에게 접근하여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 철종이 사망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를 막았다.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典會通)????을 간행하여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확립하였다. 또한 비변사를 폐지하고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였으며‚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 국민생활의 안정과 국고를 충실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왕권강화를 위해 시작한 경복궁의 중건으로 인해 국고낭비와 새로운 화폐의 발행으로 많은 문제를 불러왔고‚ 쇄국정치로 인해 근대화의 기회를 놓친 결과를 가져왔다. 석파 이하응은 서화가로서도 이름을 남겼는데‚ 그는 묵란(墨蘭)과 서예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이 행서는 이하응이 50대 중반에 쓴 행서로 ‘신단일검답군은(身單一劍答君?)’이다. 이것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으로 글씨의 왼쪽에는 노석도인(老石道人)이라는 도서가 있다. 이 도서는 이하응이 1875년이던 56세에 사용하던 것으로 이것을 통해 이 행서는 1875년경에 쓴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