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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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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삼층석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석조탑파(石造塔婆)를 줄인 것으로 석가모니의 사리(舍)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서찰에서 세운 건축물. <유래 및 발달과정> 석가모니의 열반 후 제자들은 유해를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다비(茶毘)를 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이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자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 이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사리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이로써 사리를 보관하기 위한 불탑이 등장하게 된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100년이 지나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제3대 아소카왕(Asoka‚ 서기전 273∼232)은 불사리를 안치한 8대탑을 발굴하였고‚ 발굴된 불사리를 8만 4000으로 나누어 사리탑을 전국에 널리 세워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다. 최초의 탑은 반구형(半球形)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상륜(相輪)의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장식하였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점차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형식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탑파의 건립 경로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탑의 양식은 인도‚ 중국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며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는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양식을 모방한 누각형식의 다층목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지역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비롯되고‚ 신라에서는 전탑을 모방한 석탑에서 시작된다. 통일신라시대 초시에는 상하 기단의 옥개받침‚ 추녀 끝이 약간 들이는 특징 등 석탑양식의 전형이 성립된다. 8세기에 이르면 하층기단의 탱주가 둘로 줄고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지는 등 축소현상이 나타난다. 8세기 말부터는 규모도 더욱 작아지고 간략화되는 반면 조각솜씨가 정교해져 표면에 불보살 등의 장식문양이 조각된다. 9세기경에는 조각장식이 더욱 유행하여 불국사 다보탑과 같은 이형(異形)양식의 석탑이 조성된다. 또한 옥신석에 감실을 설치하거나 화강암을 사용하는 등의 독특한 개성을 보이기도 한다.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탑파는 1‚000기 이상을 헤아릴 수 있는데‚ 건조한 재료에 따라 목탑(木塔)‚ 전탑(塼塔)‚ 석탑(石塔)‚ 모전석탑(模塼石塔)‚ 청동탑(靑銅塔)‚ 금동탑(金銅塔)이라 부르고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층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가지는 방형의 신라시대 삼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4매의 석재로 조립되었고 각 면에는 한 개의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갑석 역시 4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석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 아래로는 4단의 지붕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날렵한 반전을 보인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가 남아있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2. 김원룡 감수‚『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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