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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나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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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목조나한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불교의 수행을 완성하여 공양‚ 존경을 받을만한 성자를 표현한 상(像) <유래 및 발달과정> 나한은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살면서 불법수호의 사명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인도에서는 불교의 삼보(三寶)신앙과 함께 나한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 선종(禪宗)의 발달과 함께 나한숭배(羅漢崇拜)가 이루어져‚ 일찍이 반승의식(飯僧儀式)‚ 나한재(羅漢齋) 등이 이루어졌다. 중국은 육조시대부터 그림으로 그려졌고 당대에는 현장에 의해 『법주기(法住記)』가 번역됨으로써 십육나한의 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름난 고승들을 모델로 하여 나한의 도상(圖像)이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나한신앙의 전래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금석문(金石文)을 통해 당 말 오대 시기의 나한신앙이 신라 후기에는 전래 내려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를 비롯한 십육나한‚ 오백나한까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923년 태조가 양나라에 보낸 사신 윤질(尹質)이 5백 나한상을 가지고 귀국한 뒤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安)하고‚ 1053년 문종이 신광사(神光寺)에서 나한재(羅漢齋)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원마다 응진전(應眞殿)을 갖추고 16나한을 봉안하여 예배하였는데 나한상과 함께 나한도를 봉안하였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암괴석(套巖?石)모양의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는 나한상(羅漢像)으로 황색 대의(?衣)에 붉은 내의(內衣)를 걸치고 있으며 옷깃에는 옷자락이 목 앞으로 나와 있다. 흰 눈썹과 가늘게 뜬 눈 살짝 올라간 입 꼬리는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목근육의 비교적 사실적인 표현도 돋보인다. 전체 높이 1미터가 넘는 큰 작품이므로 부분적으로 조립되어 있다. 두상은 크게 안면부와 좌측 후면부‚ 우측 후면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양 귀는 접착시켰다. 나한상의 무릎 위에는 해태를 세로로 안고 있으며 해태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태의 뒷다리를 왼손으로 쥐고 있다. 대좌까지 길게 붉은 꼬리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치켜들어 나한과 시선을 맞추는 해태의 동세나 표정‚ 치아 하나하나의 세밀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2. 김원룡 감수‚『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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