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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센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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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마이센접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운두가 낮고 납작한 그릇의 총칭. <역사> 유럽에서 최초로 중국의 자기 제조법을 밝혀낸 것이 독일의 마이센이다. 당시 독일지방은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다양한 도요가 존재다. 그리고 당시 왕이나 권력자의 비호 아래 좋은 여건에서 제조공장을 운영하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 중국도자기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중국식 도자기의 개발이 노다지를 캐는 것 못지 않게 큰 과제 중의 하나였다. 제일 먼저 풀어야 할 숙제는 동양처럼 백색의 자기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1기-보트거 연금술사로 알려진 보트거는 작센 지방의 아우그스트2세 아래 봉직하던 티룬 하우젠과 함께 자기의 제조 비법을 밝히고자 연구하여 일여 년 만에는 철분함유량이 많은 검붉은 색의 자기이지만 부딪혔을 때 투명한 소리를 내는 자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 백색의 자기를 만들기 위해 아우레아에서 백색의 점토를 찾아내 1710년에 백색자기를 만드는데 최초로 성공한다. 2기-요한 그레고어스 헤롤드 금속산화물을 이용해 밝은 색깔의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하여‚ 다양한 패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동양식 문양에 흥미를 느껴 중국시리즈와‚ 네덜란드 스타일의 패턴‚ 프랑스 풍경화 패턴 등을 그려 넣었다. 이후 유럽에서 백색자기를 만드는 공장들이 널리 퍼지게 되어 마이센의 아이덴티티를 필요하게 되어 마이센을 상징하는 마크를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우구스트(Augustus Rex) 왕의 이니셜 AR을 넣었다. 그러나 1723년에는 작센 지방의 상징인 쌍검을 푸른색으로 새겨 넣었다. 3기-1731-켄들러 평면적인 그릇의 형태를 탈피하여 입체적인 예술품으로 나아가는 시기가 된다. 켄들러는 말이나 새등을 조형화하여 장식성이 돋보이는 자기를 만들게 된다. 당시까지 두벌구이 위에 그림을 그려 넣던 방식에서 벗어나 9000도에서 초벌구이에 직접 코발트블루를 써서 그림을 그린 후 유약을 입혀 1450도에서 재벌구이를 해 완성시키는 공정을 택했다. 켄들러는 바로크즘이라는 당시의 문예사조를 반영하는 여러 작품을 남기게 된다. 1939년에는 루트비히 제프너가 새 테이블 웨어를 창안해 괴테‚ 베토벤 등의 초상화를 그린 접시를 제작하기도 한다. 4기-1755- 미셸 빅토르 아시에 1755년 헤롤트와 켄들러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 프랑스의 조각가 미셸 빅토르 아시에가 영입된다. 그는 켄들러의 디자인에 요한 웰헴 바이만‚ 시빌리 메리안등의 유명화가들이 꽃과 과일 곤충 나비 등 자연생태를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를 제작함 5기-1817- 마이센에서는 경쟁을 의식해 도예학교를 설식기가 아니라 손을 깨끗이 씻기 위한 물을 담는 일종의 제기(祭器)였다. 그러므로 굽이 높고 깊이도 조금 깊었다. 그러나 반이 원래 식기라는 것은 《설문(說文)》에 음식을 담는 용기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반은 비교적 깊어 사발에 가까운 큰 접시를 말하고 작은 접시는 첩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주대(周代)부터 한대(漢代)까지의 반은 청동제가 많았는데‚ 수(隋)나라를 거쳐 당(唐)시대로 내려오면서 은제기로 바뀌고 아름다운 것이 많아져 삼채(三彩)의 도제가 나타났는데‚ 그 후부터 도자제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어 송대(宋代)에 완성되었다. 서양 접시의 기원을 보면 옛날에는 음식을 나뭇잎이나 나무쪽 또는 편평한 돌에 담았는데‚ 이집트에서는 정교한 금속제의 접시나 채색한 토제(土製)의 접시가 있었다. 이것이 유럽이나 근동지방으로 보급된 것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는 토기의 접시가 있어서 이것이 발달하여 17세기경 현재의 서양식 접시로 발달되었다. 서양식 접시를 분류하면 중접시를 플레이트(plate)‚ 작은 접시를 디시(dish)‚ 대형평접시를 플래터(plater)‚ 찻종받침을 소서(saucer)‚ 재떨이 접시를 트레이(tray)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류가 많아 큰 접시는 육류를 담고‚ 중접시는 과자‚ 빵‚ 샐러드 등을‚ 작은 접시는 치즈나 버터를 담고‚ 깊은 접시는 수프를 담는다. 그리고 열에 견딜 수 있는 접시는 그라탱을 담는다. 한국에서는 조선 중기의 반가의 부엌 살림살이를 열거한 책에 다반(茶盤) 또는 쟁반(錚盤)‚ 소반(小盤)이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물건을 윗사람에게 바칠 때나 물건을 담아서 운반할 때 다리가 달리거나 또는 달리지 않은 평판의 가장자리에 턱이 조금 있는 반을 사용했다. 그리고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는 대접(?)‚ 소접(小)‚ 대접시(?匙)‚ 중접시‚ 소접시라는 말이 있다. 대접이란 국물이 있는 음식을 담는 현재의 대접을 말하는 것이고‚ 소접은 접시를 뜻한다. 또는 대접시중접시소접시도 역시 접시를 뜻한다. 그러나 모양이나 재료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근래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각국의 식습관 또는 풍습에 맞는 여러 가지 형태‚ 크기‚ 장식을 한 접시가 제조되어 사용된다. 현재 사용되는 접시는 도자(陶磁)이나‚ 이 밖에 금속‚ 유리‚ 플라스틱‚ 목제‚ 죽제 등 종류가 다양하다. 이 유물은 마이센에서 만든 접시로 주문양은 접시의 내저면에 남녀가 나무아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접시의 주문양은 원형으로 마감하였고 그 원형의 테두리는 금박의 잎사귀 덩굴로 장식하였다. 접시의 테두리 역시 금박의 잎사귀 덩굴로 장식하였다.립하여 후학을 양성했고‚ 이곳의 학생들은 산화된 크롬에서 얻은 초록색을 써서 유약아래 포도 잎을 그리는 기법을 성공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인상주의적인 꽃무늬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1865년에는 기존의 알프레히츠 부르크성에서 마이센에 있는 트리뷔시탈로 공장을 이전하고‚ 1.2차 대전에서 마이센은 구 동독에 편입된다. <일반적 특징> 음식을 담거나 다른 그릇의 밑에 받쳐 사용하기도 한다. 원래는 우묵한 사발의 일종이던 것이 운두가 낮은 납작한 그릇으로 변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예전에는 접시라는 뜻으로 반(盤)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은(殷)시대에는 청동제의 반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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