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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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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陵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고구려 장수왕(長壽? : 413∼491)이 414년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廣開土?? : 391∼41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발달과정/역사> 이 비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 있다. 높이 6.39m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이며 네 면에 모두 1‚770 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부분은 먼저 시조 추모왕(鄒牟?; 주몽 朱蒙‚ 동명성왕 東明聖?)의 신이한 행적을 담은 건국신화를 소개하여‚ 고구려의 왕실이 신성하고 존엄함을 강조하였고 그것이 세대를 이어 광개토왕에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밝혔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린다는 첫부분 말미의 언급에 따라 구체적인 업적의 내용을 열거하였다. 연대순으로 광개토왕 시대의 주요한 정복활동과 그 성과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을 적고 있다. 여기에는 수묘인들의 출신지와 각 지역별 차출호수를 기록하고‚ 수묘인을 구민(舊民)과 신민(新民)으로 편성하게 된 경위와 이 규정을 감히 거스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이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下觀)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비문에는 여러 차례 광개토대왕이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倭軍)을 격파하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특히 정면 9행의 신묘년(辛卯年) 기사(記事)는 고구려 등 삼국(三國)과 왜의 관계를 전하고 있어‚ 그 이해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비 가까이에는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陵)이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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