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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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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조선은행권(백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1911년 3월 조선은행법이 공포되어 그해 8월 15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구)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은행권의 발행준비가 불충분하여 편의적으로 일본제일은행권 및 (구)한국은행권을 조선은행권으로 간주 유통시키고 은행권의 제조를 일본의 내각 인쇄국에 발주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조선총독부 인쇄국에 은행권제조를 의뢰하여 1914년 9월 1일 비로소 "조선은행" 기명의 100원권이 발행되었다. 이처럼 저액권보다 먼저 고액권부터 발행된 것은 일원‚ 오원‚ 십원의 경우는 (구)한국은행권 및 일본제일 은행권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또한 유럽에서는 이미 제 1 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어 이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현상 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원권이 발행된 이듬해인 1915년 1월 4일 일원권이 발행되고 같은해 11월 1일에는 오원권 및 십원권이 각각 발행됨으로서 (구)한국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의 회수를 촉진하게 되었다. 조선은행권의 특성 당초 조선은행권은 주로 조선총독부 직영의 공장에서 제조되었으나‚ 일부는 대장성 인쇄국에서 일본은행권과 같이 제조된 것도 있어 신양식의 4권종에는 조선총독부 제조의 것과 일본 내각인쇄국 제조의 것이 있다. 표면 하부에 전자는 "조선총독부인쇄" 후자는 "대일본 제국 정부 내각 인쇄국 제조"라는 명판을 넣었고 기호의 괄호 모양도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각인쇄국은 { }로 표시하였으며 "아라비아"숫자 자형도 상이하였다. 그리고 각은행권의 도안을 보면 백원권에는 대흑천상(?黑?像)으로 이는 일본은행 최초의 구 백원권에 있었던 것이며 다른 권종에는 나이 많은 노인상을 공통적으로 게재하고 있었다. 100원권에 있는 대흑천상은 본래 불교에서 삼보(불·법·승)를 옹호하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한다는 신으로서 뒤에는 복의 신으로 부엌에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노인은 조선말기의 인물로서 운양 김윤식(1835-1922)의 초상으로 1874년 문과에 급제 하여 외무대신‚ 대제학을 거쳐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에도 가담하는 등 구한말의 이름높은 석학이자 문장가로서 87세까지 장수하였으며 저서로는 「운양집(雲養集)」‚「천진담초(??談草)」‚「음청사(陰晴史)」등이 있다. 조선은행의 신은행권 발행 1932년 1월 4일 조선은행은 일본 내각인쇄국이 제조한 개(改) 일원권을 발행하였다. 이어 그해 6월 1일에는 개(改) 십원권이 발행되었는데 표면에는 중앙의 이화(李花)와 무궁화가 겹쳐서 인쇄되었으며‚ 개(改) 일원권에서 삭제되었던 조선은행의 휘장이 다시 부활되었다. 또한 1932년 9월 일본이 만 전쟁 물자기 동원됨에 따라 인쇄지를 비롯한 은행권 인쇄재료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1938년 12월 1일에 발행한 개(改) 백원권도 품질이 뒤떨어진 조잡한 은행권이 되었다. 전시(戰時)금융체제와 조선은행권 증발(增發) 전시체제에서의 조선은행권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물자의 부족으로 인하여 될 수 있는대로 인쇄를 간소화하고 또 저급화하였기 때문에 그 품질이 떨어져 조잡한 은행권이 발행되었다. 1944년 2월 1일에는 갑(甲) 십원권과 갑(甲) 오원권‚ 10월 15일에는 개(改) 일원권(무번호권(無番號券))‚ 11월 1일에는 갑(甲) 백원권‚ 11월 15일에는 갑(甲) 십원권(무번호권(無番號券))이 발행되어 한해동안에 5권종이 신규발행되었다. 당시 발행된 조선은행권 갑권(甲券)과 중일전쟁 이전에 발행된 개 1‚ 5‚ 10원권 및 중일전쟁 직후에 발행된 개(改) 백원권을 비교하여 보면 조선은행권 갑권은 뒷면인쇄를 요판(凹版)인쇄에서 철판(凸版)인쇄로 대체하고 인쇄도수(度數)도 1도씩 줄였으며‚ 은행권의 크기 및 주소재 등이 개권(改券)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이 종래의 은행권 앞면에 기재된 교환문구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5년 2월 15일 발행한 갑(甲) 오원권(무번호권)은 전시금융체제 하에서의 마지막 은행권이 되었다. 조선은행권의 현지제조계획 1944년 말까지 조선은행권은 대부분 일본 대장성인쇄국에서 제조되었으나 전세(戰勢) 악화로 일본의 해상보급로가 차단되어 물자수송이 어려워짐에 따라 은행권 제조 공급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었으며 현지 제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조선은행은 긴박한 전쟁으로 많은 예금 인출과 전비조달을 위한 은행권 증발에 따른 은행권 비축이 시급하였는데 당시 대장성 인쇄국에서는 제조능력의 한계점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현지 제조계획이 착수되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모조지를 사용하여 갑(甲) 천원권 70억원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갑(甲) 천원권은 심리적으로 "인플레시션"을 조장한다하여 결국 발행되지 못하였다. 주사변을 도발시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우리나라도 그 영향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후 1935 년 6월 1일 개(改) 오원권이 발행되었다. 이것은 일본내각인쇄국에서 제조된 것으로 앞면에는 발행근거를 삭제하고 뒷면은 조선은행 휘장을 삽입하였으며 지불문언이 없어져 간소화 되었다. 1937년에 들어와서는 전쟁 징후가 더욱 농후해졌고 또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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