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형산신우비 탁본

추천0 조회수 27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형산신우비 탁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이 비는 유학의 대가인 허목(許穆)께서 이조 현종 원년(1660년)에 중국에 있다는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禹手篆) 77자 중에서 48자를 선택하여 목판에 새겨 여러군데 나눠 보관했다고 한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삼척시 정라동에 우전각 안에 있는 대한평수토찬비가 있고‚ 경북 영천 임고서원과 전남 강진군 남강사에 대우수전 목판이 있다. 이 탁본의 비문은 을유년 여름에 중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비문의 유래는 미수(眉未) 허목(許穆) 형산비기(衡山碑記)에 의하면 조선 효종 6년 을미(1655년) 선조의 여러 왕자중 인흥군(仁興君)의 장남인 공자(公子) 낭선군(朗善君)이 중국 연(燕)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 77자의 비문 탁본(拓本)을 얻었는데 그 글자의 형상이 마치 용이나 뱀이 꿈틀거리는 것도 같고 새나 짐승이 움직이는 것도 같고 또는 초목의 형상과도 같이 빛나고 황홀하여 무어라 형언키 어려웠다 한다. 이 비문은 벌써 옛날 하후(?后)씨가 이 글로서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함에 중물(衆物)이 제압되어 없어지니 사람들이 안심하고 잘 살 수 있었다 한다. 이 비문이 4천년 동안이나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묻혀 있다가 중국 명나라 가정(嘉정)때(1527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발견된 것을 낭선군(朗善君)이 우리나라에 전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낭선군은 원래 고전(古篆)을 좋아 하였다고 한다. <비문내용> 久旅忘家翼輔承帝(구여망가익보승제) 집을 떠난 지 오랜동안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勞心營知衰事與制(노심영지쇠사여제) 온갖 지혜 다 짜내 열심히 일하고 규범을 만들었더니 泰華之定池察其平(태화지정지독기평) 땅이 안정되고 물이 고요해져서 處水?麓魚?發形(처수분록어수발형) 물에도 땅에도 어수가 제 모습을 나타내네 而岡弗亨伸?疏塞(이강불형신배소색) 형통하게 되었고 비색함이 없어져 明門與庭永食萬國(명문여정영식만국) 밝은 사회 이룩되어 영원토록 잘 살리라. <참고문헌> 삼척시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