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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찬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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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학연찬시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요> 학연 김태노의 詩를 모아 엮은 책 <본문내용> 학연 김태노는 동안거사 이승휴가 은거하던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었다. 김태노는 어질고 산수의 풍치를 좋아했는데 연꽃의 4가지 지조를 배운다 하여 호를 학연이라 했다고 한다. 이 시집은 단기 4296년 5월 발행했으며‚ 발행인은 김흥철 흥붕이고‚ 인쇄는 충남 대전의 "회상사"에서 했다. <해석 : 김규영‚ 최병선‚ 신창선> *이승휴(李承休) : 1224(고종 11)-130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이며‚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 가리현(京山 加利縣 ; 지금의 경북 성주)출신으로 가리(加利) 이씨(李氏)의 시조이다. 그런데 이승휴는 부친을 일찍 여윈 관계로 외가인 삼척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그의 행적은 가리현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삼척에서만 대부분이 나타나고 있다. 이승휴는 1224년(고종 11)에 태어났다. 9세(1232)에 독서를 시작하여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당시의 명유(名儒) 신서(申?)에게서《左傳》과《周易》등을 익혔다. 14세(1237)에 부친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人) 원씨(元氏)에게서 양육되었다. 그후 몽고군의 침입이 있자‚ 고려정부가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 들어가 최충(崔沖)의 사학(私學) 9재(九齋) 가운데 하나인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이규보(李?報)‚ 김창(金敞) 등에 의해 그동안 유명무실해진 사학(私學) 12도(十二徒)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는데‚ 이승휴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가 지은 병과시(病課詩)에 의하면‚ 한번은 낙성재 도회소에서 여러 학도들과 더불어 연회를 갖다가 그만 술에 취해 울고 말았는데‚ 이것을 기롱한 교도(敎導) 홍열(?烈)의 시(詩)가 도하(都下)에 전파되어 주광(酒狂)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이승휴는 최자(崔滋)에게 지우(知遇)를 받게 되었다. 최자는 이규보의 대를 이어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친 인물이었다. 이승휴는 1252년(고종 39) 29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최자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주관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이승휴는 홀 어머니가 있는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1254년(고종 41) 몽고의 5차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자‚ 이승휴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삼척의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고군에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그후 강화도에 돌아가고자 해도 최자와 돌보아주던 종조모가 세상을 떠나 의지할만한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환도(還都)하지 못하고 삼척 두타산의 구동(龜?)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는 동안 최씨 무인정권은 무너지고 고려정부는 몽고와 강화하게 되었다. 이승휴는 40세가 되는 1263년(원종 4)에 당시 강원도 안집사(安集使)로 온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심(李渙)의 주선으로 강화에 돌아가서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최윤개(崔允愷)·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박항(朴?)·최수황(崔守璜)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보내는 등 관직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도호부판관겸장서기(慶興都護府判官兼掌書記)에 보임되었다. 이후 1270년(원종 11) 삼별초가 봉기하자‚ 이승휴는 군의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이 크게 일어나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하였다. 1273년(원종 14)에는 식목녹사(式目錄事)로 있었는데‚ 당시 정부가 제배하는데 있어 초배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누차 제배받았던 인물들을 제외시키자 불만을 상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이것이 발각되어 문죄를 받게 되었을 때‚ 이승휴는 상소문의 기초자로 연루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원종(元宗)이 상부의 장의(狀意)와 방문(傍聞)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재조사를 시켜 누명이 벗겨졌는데‚ 이승휴는 양부(兩府)의 장론(狀論)에 실수의 오점을 남길 수 없다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하였는데‚ 그가 원나라에 가서 올린 진사선미(陳謝宣美)는 원나라의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으며‚ 동행하였던 송조국(宋祖國)도 `문장감중화자(文章感中華者)`라고 탄복하였다. 그후 이승휴는 원나라의 사행의 공으로 잡직서령겸도병마록사(雜職署令兼都兵馬錄事)에 보임되었다. 다음해에 이승휴는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는데‚ 그는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의 득실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그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충청도(忠?道)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臟吏) 7인을 탄핵하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였다가 원한을 사서 동주(東州;지금의 철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이승휴는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 일컬었다. 그리고 얼마후 전중시사(殿中侍史)로 다시 임명되었다. 충렬왕은 즉위 초기에 문신 재추관료들과 결합하여 원나라 및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태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侍從)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승휴는 1280년(충렬왕 6) 감찰사(監察司)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를 간언했다가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삼척시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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