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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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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바둑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바둑을 두는 판. 가로세로 각각 열아홉 줄이 그어져 있음. 기반(棋盤) <명 바둑판 이야기>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적광사(寂光寺)에는 여러 가지 바둑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표본기반(標本棋盤)이라는 이름의 바둑판이 있다. 그 두께가 3치 7푼 5리라고 한다. 약 3백년 전에 제3대 본인방 도에쓰(道?)가 바둑두기에 가장 편안한 바둑판의 두께는 `3치 9푼(11.8cm)이라는 연구 결과를 공표한 적이 있었다. 적광사 "표본기반`도 제작 당시에는 그 두께가 3치 9푼이었는데 세월따라 반면의 눈금을 몇 차례 다시 긋고 손질한것 때문에 1푼 5리 깎였다고 고증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판은 일본의 나라(?良)시에 있는 박물관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약 1천2백여 년 전의 작품으로 추정하며 원형을 전혀 손상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깨끗이 보존되어 있어 일본 정부에서 보물로 지정하였다. 그 보물 바둑판의 명칭은 목화자단기국이라 하며 그 생김새가 우리의 재래식 네발 달린 주안상과 비슷한데 반면은 자주색 박달나무판이고 가로 세로 눈금은 상아를 가늘게 박았으며 정교한 꽃술무늬 화점(花點) 17개가 박여 있다. 옆면에는 낙타‚ 사슴‚ 공작새 등 각종 동물과 꽃을 상아로 조각하여 박았고 바둑알을 넣는 서랍이 대각으로 달려 있어 정교하고도 화려한 공예예술의 진귀품으로 1천2백여 년 전부터 일본황실에서 전해 내려오는 보물인데 이것이 일본제품이 아니라 한반도나 중국에서 건너갔다는 설이 있다. 골동품상으로 유명한 서울 인사동 골목에 고서당(古瑞堂)이라는 가게가 있다. `고서당 바둑판`이라고 편의상 붙인 이름의 바둑판은 바로 그 점포의 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진기한 물건이다. 반면은 은행나무고 옆면은 배나무‚ 서랍은 오동나무로 된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판으로 조남철(趙南哲)씨는‚ 150∼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순장바둑판의 특징은 반면 바로 밑에 철사를 대각선으로 부착해서 바둑알을 때릴 때마다 `팅-팅-`하는 울림소리가 들려 풍류를 더해 준다. 현재 국에 있는 바둑판 중에 가장 값비싼 물건 중의 하나가 `탄(灘)`이라는 이름을 붙인 은행나무판으로 한일바둑상사 문인환 사장의 소장품이다 자연 고사한 밑지름 2m 40cm의 6백년 된 은행나무에서 일곱개의 바둑판을 만들어 `7남매반`이라고 명명했었다. 1974년에 절단하여 만 7년동안 자연건조 시킨 후에 제작했으며 일본의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카타(坂田榮男)9단이 조훈현9단‚ 서봉수 9단과 기념대국을 갖고 묵필서명을 한 것으로 그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신문기전 중에 제일 오래된 기전이 동아일보의 국수전이다. 올해 36기나 되는 연륜 속에 바둑계에서 확고한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바둑 타이틀전이다. 1950년대 후반에 국수전 기보가 처음 연재되었을 때 필자는 매일 흥미롭게 애독하였는데 그 당시 관전기를 담당하였던 분이 현호실거사(賢乎室居士)라는 필명으로 애기가들의 인기를 차지했던 유진하(柳鎭河)3단이었다. 유3단이 9·28수복 후 어느날 서울에서 하루종일 기원에서 소일하다 저녁때 귀가하는 길에 어느 곰탕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집 장작더미 옆에 제법 쓸만한 바둑판 하나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곰탕집 주인에게 사연을 물었더니 곰탕 끓이는 데 땔감으로 빠개서 쓰려던 참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가슴이 털썩 내려앉은유3단이 땔감으로서의 적절한 나무값을 치르고 금시라도 곰탕을 끓이는 아궁이로 들어갈뻔했던 비운의 바둑판을 구제하여 조남철(趙南哲)씨와 함께 자세히 감정해 보니 값진 비자나무 바둑판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미 작고한 지 오래된 유옹의 횡재 이야기 말고도 6·25라는 대변란을 겪는 와중에서 땔감으로 소멸된 아까운 명반(名盤)‚ 진귀품이 적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오래 전에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던 김모씨의 7치 비자나무판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해방된 이듬해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쌀 몇 가마니를 주고 샀다는 그 바둑판의 뒷면에 `水月 八段 木谷實`이라는 붓글씨가 쓰여져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니 8단의 묵필서명에 대하여 그의 제자였던 조남철 씨의 해석이 신빙할 만하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이지만 일본의 몇몇 기사들이 중국을 여행하며 바둑 친선대국을 갖게 되었는데 1943년 한국을 경유했을 때 기다니 8단이 서울에서 그 바둑판의 소유주였던 어느 일본인과 지도기를 두었던 기념으로 이름을 적은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한때 선이 굵은 정치인이라는 평을 듣던 예춘호 씨의 애장기반은 여섯 치 두께의 사방정목 비자바둑판인데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품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5백 년을 넘게 자란 원목의 고향은 어디인지 몰라도 20m를 넘는 비자나무의 우람한 둥치는 우리 인간세상에 몇 개의 명반을 남겨주고 생명을 다하였는데 그 키만큼 길고 깊은 뿌리는 서서히 썩어가면서 아직도 이 세상 어느 땅속에서 자랑스러운 `뿌리`로부터의 산출물을 대견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두산세계대백과사전 http://www.kep21.com/do_ba_st9.ht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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