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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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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교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임금이 문무관 4품 이상의 관리에게 내리는 사령. 세종 7년 왕지를 개칭한 것임. 관원에게 관작이나 관직을 내리는 교지는 고신(告身)‚ 문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교지는 홍패(紅牌)‚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내리는 교지는 백패(白牌)‚ 죽은 사람에게 관작을 높여 주는 교지는 추증교지(追贈敎旨)‚ 토지와 노비를 주는 교지는 노비토전사패(?婢土田賜牌)‚ 향리에게 면역(免役)을 인정하는 교지는 향리면역사패(鄕吏免役賜牌)라 하였다. 매우 다양하게 쓰였으며‚ 개국초에는 왕지(?旨)‚ 한말에는 칙명(勅命)이라고도 하였다. 교지는 국왕의 신하에 대한 권위의 상징이며‚ 봉건적 관료정치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원문내용> 이문숙을 절충장군 행유원 진병마첨절제사 겸 독수장으로 함 광서6년 12월 <해석 : 김규영‚ 최병선> <참고> 태조 6년(1397)에 삼척진(三陟鎭)이란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인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부사가 겸직하였는데 세종 3년(1421)에 첨절제사를 병마사(兵馬使)로 개칭하면서 역시 도호부사가 겸직하였다가 다음해인 세종 4년(1422)에 다시 삼척진 병마수군 첨절제사(兵馬水軍僉節制使)로 바뀌면서 강릉진관병마동 첨절제사(江陵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서 분리되었다. 그후 세조 12년(1466) 관제 개혁시에 부사가 겸직하고 있던 삼척진병마수군첨절제사를 분리시켜 별도의 단독장(鎭將 : 營將‚ 僉使‚ 萬戶라고도 하였음)을 두고 도둑을 잡는 토포사(討捕使)를 겸직시켜 영동 9개군과 울릉도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여 오다가 고종 35년(1898)에 삼척포진이 폐지되면서 함께 없어졌다. 이때의 각급 수령(守令)간의 위계(位階)는 부임하는 수령간의 품계(品階)에 차이가 있을 뿐 부(府)에서 현(縣)에 이르기까지 횡적으로는 대등하게 도관찰사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한편 각급 수령에게는 지방의 행정권과 함께 군사직과 사법권까지 부여되어 있어 모든 재판(태 50이상은 관찰사의 허가를 받아 사형까지 처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명의로 행사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두산세계대백과 삼척시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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