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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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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먹통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나무로 만들었으며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손잡이 끈이 달려 있다. 주로 야외에서 글을 쓸 때 먹물을 넣는 통이다. 안에는 솜이 들어 있어 움직여도 먹이 새지 않도록 되어 있다. 먹 [墨(묵)] 붓글씨에 쓰이는 문방구로 먹[墨]의 시초는 중국의 한대(漢代) 초라는 정설이 있다. 붓은 진대(秦代)의 몽염(蒙?)이‚ 종이는 한대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고 하나‚ 먹의 발명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붓을 쓰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먹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문자를 골편(骨片)이나 금석(金石)에 새겼다. 이를 갑골시대(甲骨時代)·금석시대라 한다. 그 후 인지(人智)와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갑골문이나 금석문만으로는 기록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나무 조각이나 나뭇조각 또는 천 등에 문자를 쓰게 되었다. 이때를 죽간시대(竹簡時代)라 한다. 당시 죽간에 쓰던 것은 붓이 아닌 죽정(竹挺)이란 것으로 옻[漆]을 묻혀 썼다. 그래서 그 문자의 획이 마치 올챙이 모양과 같다 하여 죽첩과두문자(竹牒文字)라고 하였다. 공자나 맹자가 쓴 글씨도 모두 이 죽간칠서(竹簡漆書)였다. 견백(絹帛)이란 천(명주)은 종이보다 다소 먼저 발명되었다. 죽간시대에 이미 명주에 글씨를 썼으며‚ 이 글씨는 붉은 단서(丹書:붉은 광석이나 돌가루를 반죽하여 그것을 붓에 묻혀 쓴 글씨) 아니면 검은 묵서(墨書)였다. 이때 묵서의 원료는 자연산 석날(石靭)이라는 일종의 광물이었다. 석날이란 오늘날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黑鉛)의 일종인 듯하며‚ 거기에 옻을 섞어서 썼던 모양이다. 그 후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그을음‚ 즉 연매(煙煤)를 옻 대신 썼다. 이어서 아교풀과 섞어 쓰게 되면서 드디어 제묵(製墨)의 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한(前漢)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먹은 만들지 못한 듯‚ 당시에 쓰였던 얇고 편편한 벼루와 마묵구(磨墨具)가 낙랑채협총(樂?彩瑩塚)‚ 그 밖의 한대(漢代)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25∼220년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과 같은 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이의 발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송연묵(松煙墨)을 생산하였고‚ 유연묵(油煙墨)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남당(南唐)의 후주(後主)가 먹의 사용을 장려하여 이정규(李廷?)와 같은 유명한 묵공(墨工)이 나왔고‚ 그 후 송(宋)·원(元)·명(明)·청(?)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많은 묵공이 배출되고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한국의 제묵 연혁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먹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위만·낙랑시대에 중국의 것을 본받은 것이 사실인 듯하며‚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신라의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격(品格)이나 질이 매우 좋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조선묵(朝鮮墨)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먹은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먹을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제지법과 제묵법을 610년에 전해준 데서 비롯되었다. 일본인 자신들도 이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신라의 먹을 수입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한다. <참고문헌> 엠파스백과사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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