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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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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백자청화붓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붓은 서화(書怜)를 그리는 도구로 일반적으로 짐승의 털을 추려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죽관(竹管) 또는 목축(木軸)에 고정시킨 것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이다. 붓의 기원에 대해서는 서기전 3세기에 진(秦)나라의 몽염(蒙?)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설(說)이 구구하다. <사기 史記>의 몽염열전(蒙?列傳)에는 붓의 발명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술이 없고‚ 다만 서기전 221년 진나라의 천하 통일 후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또 몽염의 발명설에 대해서 송대(宋代)의 소이간(蘇易簡)은 저서 ≪문방사보 文房四寶≫에서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자기들의 치세(治世) 동안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발명설을 주장한 것 같다.”고 비평하고 있다. 우형(牛亨)도 “모필(毛筆)은 서사(書寫)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하여 몽염이 붓의 발명자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 근대의 학자들은 “몽염은 붓의 발명자가 아니라 개량자일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로는 <사기>에 몽염이 내사라는 직책을 맡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사는 국가의 법전을 관장하며 조서(詔書) 및 궁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을 말한다. 이는 공문서의 기초나 서사·복제 따위의 일을 맡은 직책이었다. 그러므로 일을 위해 서사 용구(書寫用具)를 개량한 것이라 하였다. 몽염의 붓 발명설은 3세기 진(晉)나라의 학자 장화(張華)가 저술한 <박물지 博物志>에 ‘蒙?造筆(몽염조필)’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데에서 연원된 것 같다. 그러나 이 기록은 구양순(歐陽詢)의 <예문유취 藝文類聚>와 백거이(白居易)·공전(孔傳) 공편의 <백공육첩 白孔六帖> 그리고 <태평어람 ?平御覽>에 인용되어 있을 뿐 현존하는 <박물지>에는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몽염에 의한 붓의 발명설은 증거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문헌이나 출토품에서도 그 이전 은·주시대(殷周時代)부터 붓이 사용되었던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 예로 은·주시대 청동기의 문자는 붓으로 쓴 각적(刻跡)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은대(殷代)의 복사(卜辭) 갑골 문자(甲骨文字)도 뼈의 표면에 먼저 붓으로 쓴 다음 새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뭇가지나 댓가지에 먹을 묻혀 필사하였으나‚ 그것이 불편하여 뒤에 부드러운 짐승 털로 바꾼 것이다. 붓의 형태는 축(軸)·수(穗)·초(瑟)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축은 죽관이 많으나 목봉(木棒)이 사용되기도 한다. 수의 재료로서는 양·여우·토끼·호랑이·사슴·산돼지·살쾡이·이리·담비·개·말 등의 털이 사용되었다. 이들 털을 추려 모아서 그 끝을 마사(麻絲)로 감아 칠로 굳힌 다음 축의 선단(先端)에 붙여 만들었다. 붓은 모양과 용도에 따라 장봉(長峰)·중봉(中峰)·초필(抄筆) 그리고 심을 박은 것과 박지 않은 것 등으로 나누어진다. 본 박물관의 붓은 붓봉이 백자로 만들어진 특이한 모양으로‚ 길이가 약 35㎝의 장봉이다. 붓털은 윤기있으며 길고‚ 붓봉은 붓털쪽으로 갈수록 두꺼워져 둥근 호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붓봉 끝에는 끝이 달려있다. 전면에 걸쳐 청화로 산수문과 초문‚ 어문이 시문되어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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