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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도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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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공묘도판화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중국 당(唐)나라 때 공자가 문선왕(文宣?)으로 추봉(追封)됨에 따라 문선왕묘라고 부르다 원대(元代) 이후로 문묘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에서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하면서 공자에 대한 국가적 규모의 제사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그 출생지인 궐리(闕里)에 한정되었으며‚ 수(隋)나라 때까지는 주대(周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했다고 하는 주공(周公)이 국학(國學)의 사당에서 선성(先聖)의 자리를 차지하고 공자는 선사(先師)로서 배향(配享)되었을 뿐이다. 그 후 당의 태종이 유교정치를 표방하면서 공자가 선성의 자리에 모셔지고 안회(顔回)가 선사(先師)로 배향되었으며‚ 송대에 주희(朱熹)가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정통(正統)의 확립을 강조함에 따라 문묘의 향사제도가 정비되었다. 한국에서 공자 사당의 유래는 통일신라 때인 714년(성덕왕 13)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그 제자인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명에 의해 국립대학에 해당되는 국학(國學)에 모신 것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향사(享祀)제도를 따라 운영되었으며 주자성리학이 전래됨에 따라 대성전(?聖殿) 건립이나 배향자 정비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치에서 유학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그 내용이 심화되면서 제도와 운영이 더욱 정비되었다.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각 군현의 향교에 세워졌는데 제도적으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아래에 있었으나 정치와 유학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태종대에 공자에 대해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 ·맹자(孟子) 등 4성(四聖)과 그 밑의 10철(十哲)을 배향함으로써 유학의 큰 도통(道通)은 정리가 되었으나‚ 조선의 학자들을 모시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사림파(士林?)의 이념적 정치적 승리가 완결된 시점도 광해군대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이른바 5현(五賢)이 문묘에 종사(從祀)된 때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이이(李?)와 성혼(成渾)에 대한 종사 문제는 서인 ·남인의 학맥(學脈)과 연결되어 현실 정치 상황에 직결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최종적으로 공자를 정위(正位)에 두고‚ 좌우에 4성 ·10철 및 중국 송대의 6현(六賢)을 배향하고 동무(東)와 서무에 각각 중국의 명현 47위와 한국의 명현 9위를 종사하였다. 광복 후에는 동무와 서무의 중국인의 위판을 땅에 묻고 한국의 명현은 대성전에 올려 모셨다. 현재 성균관에 전해오는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고 중수를 거듭한 것이다. 본 박물관에 소장중인 공묘도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공묘 또는 문묘라고 불리는 것의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특히 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공묘도는 판화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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