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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문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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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강세황문구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강세황은 본관 진주(晋州)사람이다. 자는 광지(光之)이며. 호는 첨재(減齋) ·표옹(豹翁) ·노죽(路竹) ·산향재(山響齋) ·표암(豹菴) 등 여러가지이다.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으로 만들겠다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樣) ·이수봉(李壽鳳)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減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강세황은 문인화의 대가로 전문적으로 화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취미나 여기로 그림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의 외형을 충실히 묘사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는 묵희의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시를 잘 짓고 글을 잘 쓰며 그림을 잘 그려 시서화 삼절이라고 불리는 소동파나 김정희 등이 이들 문인화가들의 이상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본 작품도 이러한 문인화로서 문구를 묘사한 작품으로 병과 접시‚ 붓과 책 등을 소재로하였다. 문구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 그림에서 추구하고자 하였던 문자향과‚ 서권기(書卷氣)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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