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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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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성 김대건 신부 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최초의 한국인 신부이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담았던 관. <유래 및 발달 과정/역사> 김대건은 1821년(순조 21)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濟俊‚ 보명은 濟麟‚ 字는 信明‚ 이냐시오)과 장흥(長興)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증조부인 김진후(震厚‚ 보명은 運祚‚ 비오) 때였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1836년으로‚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같은해 모방신부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고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은 앞서 선발된 두 소년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하였다. 그러나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모방신부는 세 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신학생들은 현지에서의 민란으로 인해 피난을 가는등 많은 사건을 겪었으며‚ 그러던 중 한 신학생이 열병으로 사망했다. 김대건은 조국으로의 입국을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신학공부를 계속하여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는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 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은 받지 못하였다. 그는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상해로 도항하여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월 12일 다시 입국하였다. 그의 교회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교구 부교구장이었다. 그는 1846년(헌종 12)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巡威島)로 왔다.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가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음 7월 2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 1925년 7월 5일에 복자(福者)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시체는 모래 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 이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교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일반적 형태‚ 특징> 너비:55cm‚ 옆너비:33cm‚ 높이:34cm 최초의 한국인 신부이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담았던 관이다.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미리내에 안장되었던 유해를 1901년 용산 신학교로 옮기고 1902년부터 1994년까지 본교 대성당에 보존할때 사용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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