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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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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신화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조선 후기(약1700∼약1850)는 우리 나라의 회화사에서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실학(實學)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 후기를 지배한 시대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회화는 대체적으로 일반과 보다 가까워지고‚ 생활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여 한국적 회화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중기이래 유행하였던 절파화풍이 쇠퇴하고‚ 그대신 문인화(文人畵) 또는 남종화(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 등 원말의 4대가를 비롯하여 명대의 심주와 문징명 등 오파의 화가들‚ 청대의 정통파의 화풍이 전해지면서 조선 중기에 이미 수용되기 시작한 남종화가 선비화가들과 화원들에 의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벽은(僻隱) 진재해(秦再奪)이후로 절파화풍은 미세한 부분적인 잔재만 남긴 채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남종화법에 기반을 두고 우리 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대두하였다. 정선파(鄭敾?)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화풍은 조선 초기의 안견파 화풍에 대응하는 매우 중요하고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는 풍속화(風俗畵)가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풍속화의 대표자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이다. 넓은 의미에서 풍속화의 시작은 김홍도보다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으나 김홍도와 그 후의 화가들에 이르러 어욱 뚜렷한 양상을 이루고 있다. 네 번째로는 청조의 회화와 그곳에 전래되어 있던 서양화풍이 전해져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에의 하여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양화풍은 일부 작품들에 나타나 있을 분 널리 유행되지 못하였지만 음영법과 투시도법을 특색으로 하여 조선 말기 화원들에 의해 궁궐도‚ 초상화 민화에 폭넓게 채택되기에 이른다. 본 유물은 조선 18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화(神畵)이다. 종이에 수묵담채(水墨?彩)하였다. 화면 가득히 어딘가를 바라보는 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덥수룩하다. 머리는 약간 대머리이다. 상체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으며 흰색 치마를 입고 그 위에 검은 숄 형상의 옷을 덫 입었다. 흰 치마 위로 늘어진 리본이 매우 인상적이다. 크로스 백(cross bag)형상으로 한쪽 어깨에 걸쳐내려 허리춤에 오는 보따리를 매고 있으며 한쪽 손에는 붉은 끈이 달린 지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가늘고 긴 지팡이를 잡고 있다. 팔의 근육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손은 발처럼 뭉툭하고 손톱은 뾰족하다. 신발은 신지 않았다. 이 인물의 주위로는 지면(地面)과 바위를 그려 넣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높다란 바위가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무성하게 풀이 자라있다. 바위는 농담을 달리하면서 묵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인물을 크게 부각시키고 배경을 과감하게 축소시킨 절파화풍(??畵風)의 작품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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