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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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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불랑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불랑기는 15세기경 포르투칼 등 서구제국에서 사용되던 포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는 16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다. 당시의 유럽을 총칭하여 불랑기국(佛狼機國;프랑크제국의 음역)이라 한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여 발사하는 화포로는 유일하게 뒤에서 장전하는데 이전의 화포와는 달리 연속 발사가 가능하며‚ 마차나 포가에 얹으면 상하좌우로 조준이 가능하다. 발사틀 역할을 하는 어미포(母砲)와 실탄을 장전‚ 어미포에 삽입한 뒤 발사하는 자식포(子砲)‚ 그리고 포가로 구성되는데‚ 크기에 따라 1호에서 5호까지 다섯 종류가 있다. 우리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은 4호 불랑기로 조선 숙종 6년(1680) 강화도 (천수인)千守仁이라는 기술자가 주조한 것이며‚ 현재 어미포만 남아 있고‚ 현재 康熙 19年이라는 명문이 있는 포열만이 현존한다. 불랑기(佛狼機)는 불씨를 손으로 혈선(穴線)에 점화하여 발사하는 화기(火器)로는 유일한 후장식(後裝式) 화포(火砲)이다. 불랑기(佛狼機)는 15세기경 포르투칼 등 서구제국에서 제작되어‚ 1517년경에는 불랑기국(佛狼機國;당시의 유럽 총칭)의 상선(商船)이 중국 광동(廣東)에 와서 처음으로 전하게 됨에 따라 이를 본따 만든 불랑기를 실전(實戰)에서 사용된 바 있다. 그 후 우리나라에는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말미암아 명군나라 원군(援軍)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이전인 명종조(明宗朝)에 이미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불랑기(佛狼機)라는 명칭은 프랑크(Frank)의 한자식 표현이다. 최초 중국 남부지역에 상륙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동남아 회교도들을 앞세우고 왔는데‚ 중국 관원이 `저 코 크고 머리가 누런 자들을 뭣으로 부르느냐`고 회교도들에게 묻자‚ 회교도들은 자신들이 유럽 사람을 통틀어 지칭하던 `프랑크(Frank)`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유럽인을 불랑기라 통칭하고‚ 그 후‚ 그들이 전해 준 화포도 같은 말로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랑기포는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널리 활용되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많은 수가 제조되어 함선용(艦船用) 내지는 수성용(守城用)으로 사용되었는데‚ 신미양요(辛未?擾;고종 8년‚ 1871) 당시에도 강화도(江華島) 초지진(草芝鎭)과 광성보진(廣城堡鎭)에서 사용하였다. 포술(砲術)을 군사들에게 가르치는데 이바지한 사람은 동양의 여러 나라와 무역에 종사하다가 인조(仁祖) 6년(1628)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네덜란드인 J. 벨테브레‚ D. 히아베르츠‚ J. 피에테르츠 등 3명이었다. 이들은 훈련도감(訓練都監)에 배속되어 포복부(腹部)쪽으로 점차 두텁게 처리하였고‚ 자포가 들어가는 복부는 장방형(長方形)인데 포구쪽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부에는 가늠자가‚ 그리고 포구 위에는 가늠쇠가 달렸다. 한편 자포가 들어가는 복부 뒷쪽 중앙부위에는 자포가 삽입되어 발사과정에서 그 반동으로 튀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빗장쇠를 꽂을 수 있도록 네모꼴 구멍이 좌우 뚫려있으며‚ 병부(柄部)에는 빗장쇠가 쇠고리줄에 연결되어 있다. 이 불랑기포는 포복실(砲腹室)과 포신(砲身)사이에 정철(定鐵)이 달려 이를 포가(砲架)에 얹어 고하(高下)와 좌우(左右)로 조정조준(調整照準)하여 목표물에 발사하게 되었지만‚ 고종(高宗) 11년(1867)에 이르러서는 신헌(申櫶;1810∼1888)장군이 동차(童車)와 마반차(磨盤車)를 창제함으로서 그 운용면(運用面)에 있어 매우 발전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박물관이 소장한 이 불랑기는 포열의 명문에 의하면‚ 강희(康熙) 19년(1680)에 강화도의 천수인(천수인)이라는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포는 전해지지 않고 모포만 남아 있다. 술을 비롯한 서양의 무술을 가르치다가 인조 14년(1636)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참전하여 벨테브레만 살고 나머지 2명은 전사하였다. 벨테브레는 박연(朴?/朴燕)이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조선에 정착하였다. 이 불랑기의 구성(構成)은 발사틀의 역할을 하는 모포복부(母砲腹部)에 장방형(長方形)의 구멍을 뚫은 활강포신(滑腔砲身)을 갖춘 모포(母砲)와 실탄(實彈)을 장전(裝塡)하여 모포복부(母砲腹部)에 삽입하여 발사하는 원통형(圓筒形)의 자포(子砲)로 구성된다. 또한 그 체형(體形)은 큰 일호(一號)로부터 가장 소형인 오호(五號)까지로 구분되며‚ 그 체형에 따라 화약이나 탄환(彈丸)의 용량에 차등을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체형에 비해 통신(筒身)이 길고 포구(砲口)에서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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