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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하필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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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조영하필 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조영하(趙寧? 1845-1884)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기삼(箕三)‚ 호는 혜인(?人)이고‚ 조대비(趙??:신정왕후)의 조카이다. 1863년(철종 1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규장각 대교(待敎)가 되고‚ 조대비의 총애를 받아 1865년(고종 2) 대사성(?司成)에 특진하였다. 1873년 호조판서 때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대원군 세력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그해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음해 금위대장(禁衛?將)이 되고‚ 훈련대장을 거쳐 1876년 경연지사(經筵知事)·공조판서를 지냈다. 1880년 이조판서가 되고‚ 그뒤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사대당(事?黨)의 실력자가 되었다. 1882년 전권대신이 되어 조·미‚ 조·영‚ 조·독 수호통상조약(修?通商條約)을 체결하였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에 좌천되었다가 접견대관(接見?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파병을 요청하여 임오군란의 주동자 색출과 대원군의 납치를 실현하여 민씨세력이 재집권하도록 했다. 그해 재차 진주사(陳?使)로 청나라에 가서 기계·무기 등을 수입하고‚ 관세·외교의 고문으로 묄렌도르프를 입국하게 하였다. 판리통리아문사무(辦理統理衙門事務)·독판통상사무(督辦通商事務)·도통사(都統使)를 거쳐 1883년(고종 20) 예조판서에 재임되고‚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민영목(閔泳穆)·민태호(閔台鎬)와 함께 살해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을해년(乙亥年) 12월 28일에 조영하(趙寧?)가 보낸 답장이다. 연말에 처리해야할 읍의 사무가 많아 골치 아플텐데도 자신을 잊지 않은데 대한 감사를 표시하며‚ 보내준 물건을 감사히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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