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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필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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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나철필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작가> 나철(羅喆‚ 1863-1916)의 자는 문경(文卿)‚ 호는 경전 · 홍암(經田 · 弘巖)‚ 아명은 인영(寅永)‚ 당호로는 일지당(一之堂)을 썼으며‚ 본관은 나주(羅州)다. 전라도 낙안(樂安‚ 현 벌교읍)의 한미한 집안에서 출생했으나‚ 1880년대 전반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문인(門人)이 됨으로써 정치적 출세의 계기를 마련했다. 1891년의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한 후 승정원 가주서(承政院 假注書)‚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등을 지내다가 갑자기 낙향했다. 제주에 유배된 스승 김윤식을 5년간 배종(陪從)하다가 부인의 죽음을 계기로 제주에서 고향에 돌아왔다. 1901년에 상경하여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자강운동에 합류하였다.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한 외교노선을 추구하며 일본의 활동에 기대를 걸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일제(日帝)의 간계를 깨달았다. 이후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여 오적(五賊)의 저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라도 신안의 지도(智島)에 정배되었다가 얼마후 방면되었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오기호(吳基鎬) 김윤식 등과 함께 대종교(?倧敎)를 창시하여 민족의 시조인 단군(檀君)을 개국시조로 받들며 민족의식의 고취에 앞장섰다. 1916년 9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에 항의의 뜻으로 자결하였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그가 서울에 체류할 당시의 편지로서 얼핏 보면 안부를 묻는 내용이지만‚ 행간 속에 뭔가 암시된 표현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범상하지 않다. 이를테면 모임에서 만(萬)의 하나도 이야기를 못했다거나 벼루와 붓으로는 하고싶은 말을 다할 수 없다는 표현 등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회의 결성이나 대종교의 창시와 관련되는 내용의 편지로 추정되는데‚ 나철의 1900년대 활동을 파악하는데 참고되는 자료이다. <기타참조>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참고문헌>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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