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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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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제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제문은 죽은 사람에 대하여 슬픈 뜻을 표하는 글로서 대개 제물(祭物)을 올린 뒤에 읽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임신년(壬申年) 9월 16일에 유학(幼學) 한용식(韓用植)이 작성한 제문이다. 한용식은 이 제문에서 남전사(藍田祠)에 배향된 이원춘(李元春)을 비롯한 석주관(石柱關) 7의사(7義士) 즉 왕득인(?得仁)‚ 왕의성(?義成)‚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의 충절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그들의 충과 효를 추모하였다. 남전사에 배향된 이들은 정유재란 때 호령(湖嶺)의 입구인 석주관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을 무찔러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이들의 개개 행적은 다음과 같다. 1)이원춘(李元春‚ 1554-1597) : 정유재란 당시 구례현감으로 있었는데‚ 적이 구례로 침입하자 인근 수령과 명나라 군사들이 도망한 와중에도 요충지인 석주관에서 적과 싸웠다. 적의 기세가 너무 등등하자 성의 창고를 불사르고 남원성으로 옮겨 적과 싸우다 성안에서 순절하였다. 2)왕득인(?得仁‚ 1556-1597) : 정유재란시 구례가 적의 침입을 받아 초토화되고 살육이 극심하자 석주관에서 의병을 규합 왜적과 싸우다 순절했다. 3)왕의성(?義成‚ 1574-1641) : 왕득인의 아들로 가풍을 이어 어려서부터 충과 효에 뛰어났다. 정유재란때 부친이 순절하자 복수장(復讐將)으로 기치를 들고 석주관으로 달려가 역전하던 중 적탄을 맞았다. 4)이정익(李廷翼‚ 1571-1597) : 정유재란 때 석주관 전투에서 왕의성?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과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5)한호성(韓?誠‚ ?-1597) : 정유재란 때 구례가 적의 침입을 받자 장검을 빼어들고 의병의 규합‚ 석주성으로 달려갔다. 많은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렸으나 왜적의 집중공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6)양응록(梁應祿‚ ?-1597) : 정유재란 때 석주관 전투에서 왕의성?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과 분전‚ 많은 적을 물리치고 순절하였다. 7)고정철(高貞喆‚ ?-1597) : 정유재란 때 석주관 전투에서 왕의성?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과 사력을 다해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8) 오종(吳琮‚ ?-1597) :정유재란 때 석주관 전투에서 왕의성?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과 분전하다가 결전 끝에 순절하였다. <기타참조>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참고문헌>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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