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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면필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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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송기면필 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은 근대의 학자로 본은 여산(礪山)‚ 자는 군장(君章)‚ 호는 유재(裕齋)‚ 전라도 김제 출신이다. 초년에는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서 문장‚ 서화‚ 역산(曆算) 등을 두루 배웠고‚ 만년에는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성리와 의리에 관한 학풍을 받아들여 학문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는 심성설(心?說)에서 전우의 기본명제인 ‘성존심비(?尊心卑)‚ ’성사심제(?師心弟)‘의 설을 추종하여 계승‚ 전개시켰다. 그는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유교의 생활규범을 철저하게 지켜가며 전통 유학사상의 토대 위에 근대 유학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좌표를 설정하고‚ 고향의 요교정사(蓼橋精舍)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면서 “선비는 도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신하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다.”고 강조하였다. 항일정신이 투철하여 단발은 물론 일본식 성명강요를 거부하였다. 그는 특히 서예에 뛰어나 왕희지 ? 미불 ? 동기창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정도였으며‚ 전우의 부탁으로 임헌회(任憲晦)의 신도비명을 비롯하여 많은 비문을 썼다. 김제 병암사(屛巖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유재집》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서간은 송기면이 왕수환에게 보낸 것이다. 봄에 편지를 할 때 조장 한 장과 석전(石田)에게 가는 편지를 아울러 싸서 우편으로 부쳤습니다. 아득히 답장이 없으니 편지가 도중에서 없어져 그렇습니까? 아니면 놓아두고 나를 도외시하여 그러합니까? 한탄(?歎)하고 의아(疑訝)스럽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친척 부자(父子) 형제 사이가 아니고 또한 거장반면(車匠半面)의 사귄 처지도 아닌데 오히려 열렬(烈烈)히 잊지 않은 것은 대개 우리 유림들이 점차 줄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매천집을 청해 달라고 요구하였기에 부득이 저의 책을 주었으니‚ 혹 반포하지 아니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다섯 질을 우체국 대금 체환(替換)으로 부쳐 주시기 바랍니다. 소장(所藏)을 원하는 사람의 청을 다 응한다면 10질도 오히려 부족하겠습니다. 창강집은 그곳에 넉넉히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선숙부(先叔父) 어른 문집(文集)은 이미 간행이 끝났습니까? 매천집을 청한 수와 아울러 같이 보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창강집은 마땅히 정해진 대금(代金)이 있을 것이니 말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책값을 먼저 보내야 할 것인데 책의 유무(有無)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답장 보내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선사(先師) 석정문집(石停文集)의 간행 일은 이미 창강의 손을 빌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판권(板權)에 구애되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박창현?권봉수 두 분은 내 비록 만나지 못하였으나 매천집으로 인하여 대개 그 좋은 풍의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체후 평안하심을 문안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계축년(1913) 8월 26일 기복생 송기면 이배 <기타참조>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참고문헌>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망각(忘却)의 땅에 둬버리기 때문에 감히 두어 줄 글을 올려 보아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중추(仲秋)의 복중(腹中)에 체후 만안하시고 선숙부(先叔父) 소천(小川) 선생의 장례(葬禮)는 어느달‚ 어느 산에 하며‚ 문집 간행은 어떻게 하십니까? 멀리서 간절히 빌며 절절(切切)히 듣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달에 또 사내 자식을 얻어 부모 모신 사람으로 기쁨을 드릴 수 있게 되었고‚ 다른 것은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일찍이 말씀드린 다섯 분의 유림(儒林)은 다 명사(名士)인데 그 감상하는 능력이 넉넉히 남의 시문을 해독(解讀)하며‚ 그 중에 김연익(金然翊)과 조우성(趙友誠)은 곧 동간원(同刊員)으로‚ 매천 선생의 흠모하는 뜻을 대게 알 만합니다. 자주 나에게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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