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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환외필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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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왕수환외필 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왕수환(?粹煥)은 1912년 『개성가고(開城家稿)』를 간행하였으며‚ 1908년 봄에 세워진 사립학교인 구례 호양학교(壺陽學校)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황현‚ 김택영 등과 교유하였다. 권봉수(權鳳? 1872-1940)의 자는 경소(景韶)‚ 호는 지촌(芝村)‚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매천의 제자이면서 매천집 간행 주역의 한 사람이다. 박창현(朴暢鉉 1863-1929)의 자는 춘경(春卿)‚ 호는 매사(梅史)‚ 본관은 순천(順?)으로 전남 구례 출신이다. 매천집 간행 주역의 한 사람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가을에 주신 혜함을 받으니 위안됨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귀하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매천집을 공선(公選)하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희들이 본래 문자에 생소하고‚ 또 강학가(講學家)의 체면(體面)에 어두워 구습(舊習)을 따라 지금에 이르니‚ 태만한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답장을 하지 않으면 더욱 죄가 더하기 때문에 감히 망령된 말로 꾸중을 막고자 하오니‚ 귀하는 그것을 망언으로 들으십시오. 생각건대‚ 면암(勉癌) 선생의 정충 대절(貞忠?節)은 일월(日月)과 같이 밝으니 우리 나라에 하늘을 이며 땅을 밟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흠모(欽慕) 않을 수 없거늘‚ 하물며 글을 읽고 선비라 칭하는 자로서 어찌 감히 김창강이 하는 말로 인해서 면암 선생을 더럽히겠습니까? 창강이 매천집을 뽑을 때 정선(精選)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기 때문에 시는 2분의 1을 문(文)은 4분의 3을 빼버렸고‚ 더욱이 잡문(雜文)에 있어서 취한 것이 적어 빠진 것만 보더라도 그 수를 셀 수 없습니다. 때문에 혹 한두 친구가 사사로이 누구의 시‚로 아는 것은 오직 우리 나라 사람 뿐인데 이제 매천집을 천하에 반포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의 안목으로 국한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벽계라고 바로 지칭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면암을 위한다고 하여 매천의 사문에다 협잡(挾雜)하여 공정하게 쓰지 않는다면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창강의 행한 일을 더듬어 보면 난리를 피하여 간 관영이나 버들강아지를 주웠던 도연명의 옛 사람처럼 홀로 아름다움을 차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같은 사람이 애증(愛憎)의 감정으로 남의 문집에 사사로이 기록하였겠습니까? 결코 그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대현을 희롱했다고 하면 그것이 면암에게는 무엇이 해롭기에 여러분들은 갑작스레 성을 내어 질문하고 성토하고자 함이 그치지 않습니까? 이것이 강학가의 공통된 병폐입니다. 옛적에 황매천이 시구(詩句) 때문에 연재(?齎)의 문도(門徒)들에게 미움을 받은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시인의 말이란 혹 경솔함이 잇다 하더라도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지극한 도리(道理)가 현묘(??)하고 심오하여 지자(知者)가 보면 지(智)라 할 것이며‚ 우자(愚者)가 보면 우(愚)라고 할 것이니‚ 의(義)와 이(理)가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의리란 공중에 걸린 보주(寶?)와 같아 오색(五色)을 정하기 어려우니 보는 자가 스스로 취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양응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기릉하였으나 한(漢)나라의 학자들이 무리를 지어 일어나 성토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응이 공자오 맹자를 어겼다 아니하고‚ 다만 분수에 넘치고 망령된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모두 그 때와 후인들의 정론(定論)에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구구히 날카롭게 글고 말로 다투어 사람을 이기려 하고 스스로 편협한 구덩이에 빠지고자 합니까? 조선조(朝鮮朝) 5백 년에 번번이 문자(文字)와 의리(義利)와 이기(理氣)의 싸움으로 일거에 사람을 수백씩 죽여 그런 뜻이 없었다 할지라도 사색 당전(四色黨戰)이 그 처음에는 또한 그 세 가지에서 연유되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세상이 크게 변하여 이에 미칠 여가가 없기 때문에 그 폐단이 조금 식었는데 제공(諸公)이 또 이를 본받고자 합니까? 원컨대‚ 이 지기(志氣)를 축적하여 한번 외인(?人)고 싸우되 한집안에서 싸워 화기(和氣)를 상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글이 거칠고 서툴며 곁가지를 늘어 놓았으니 용서하시기 바라며 아울려 깊은 겨울에 체후 보안 하시길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계축년(1913) 11월 21일 생 왕수환?박창현?권봉수 재배 <기타참조> "국역 황매천 및 관련 누구의 글을 선(選)에 넣어 달라고 부탁해도 하나도 허락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채리상량문(加?里上梁文)을 어찌 사심으로 빼내버렸겠습니까? 창강의 뜻인즉 선에 합당한 것은 그것을 넣고‚ 뽑지 못할 것은 버려서 이 글을 간행하면서 책장을 접어 놓은 정도에 이르면서까지 결코 회피하지 아니하였으니‚ 자기 문고(文稿) 가운데 오호부로서 압수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매천의 집 자제(子弟)와 이곳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은 신중히 살핀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것은 인쇄를 말라고 하여 이 글이 빠진 것입니다. 대현(?賢)을 벽계(碧溪)라고 고친 것은 비록 창강의 뜻은 알지 못하겠으나‚ 생각해 보면 시문의 법이 그 지목한 곳에 당하여는 오직 그 하나를 지적하는 것이요‚ 또 대현이라고 말해서 벽계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참고문헌>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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