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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도가8폭병풍
- 저작물명
- 무이도가8폭병풍
- 저작(권)자
-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 출처
- 공표년도
- 창작년도
- 2015-01-31
- 분류(장르)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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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정보
- <작가> 정로(鄭魯‚1751-1811)는 자(字)가 공면(公勉)‚ 호는 창파(蒼坡)‚ 본관은 청주(?州)이며‚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후손이다. 아들 정시(鄭蓍)가 가산군수(嘉山郡守)로 재직했을 때 그곳에 머물던 중 1811년 홍경래(?景來)의 반란이 일어나 여러 고을이 점령되고 반군이 가산에도 몰려들자 아들의 피신 권유에도 떠나지 않고 관군과 함께 싸우다 살해되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가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8곡병풍의 내용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99)가 무이산(武?山) 복건성 숭안현(福建省 崇安縣)에 은거하면서 그곳 구곡계(九曲溪)의 빼어난 경치를 읊은 <무이도가(武?櫂歌)>이다. 주희는 54세 되던 1183년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武?精舍)를 짓고 강학(講學)과 은거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의 학문적 기틀이 형성되었다 한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이 시를 널리 애송하곤 했는데‚ 서시(序詩)를 포함 모두 10수로 흔히 이를 각각 한 폭에 써서 10곡 병풍을 만든다. 정로의 글씨에서는 서시를 제외한 9수를 8폭에 연이어 썼다. 말미의 “세청양지소춘(歲靑羊之小春)”는 을미년 십월(乙未年 十月)이므로 1775년에 해당된다. <기타참조> "강운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참고문헌> "강운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 저작물 파일 유형
- 저작물 속성
- 1 차 저작물
- 공동저작자
- 1유형
- 수집연계 URL
- http://www.emuseum.go.kr
- 분류(장르)
- 사진
- 원문제공
-
원문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