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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속집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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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연암속집 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박지원(燕岩 朴趾源 1737∼1805)의 시문집이다. <개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자는 미중(美仲)‚ 중미(仲美)‚ 미재(美齋).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冽上?史)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북학파(北學?) 실학자(實學者). 홍대용(??容)‚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하였다. 1901년(광무 5) 김택영(金澤榮)이 9권 3책으로 간행한 바 있으나‚ 이것은 본집(本集)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저자의 아들 종간(宗侃) 등이 편집해 두었던 57권 18책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17권 6책으로 발행하였다. 속집은 앞에 남정철 신기선의 서가 있다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권1∼2}가 열하일기이며 {권3}에 보유‚ 서‚ 문답‚ 서(序)‚ 기‚ 묘명‚ 행상‚ 소‚ 서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김유정 등의 발이 있다. 박영철본의 편목은 다음과 같다. 서발(序跋)이 없고 앞에 상세한 총목이 있다. 내용은 권1에 서(序) ·기(記) ·인(引) ·논(論) ·장(狀) ·전(傳)‚ 권2에 서(書) ·묘지(墓誌) ·묘갈(墓碣) ·비명(碑銘) ·탑명(塔銘)‚ 권3에 서(序) ·기(記) ·논(論) ·장(狀) ·발(跋) ·설(說) ·소(疏) ·책(策) ·서(書)‚ 권4에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으로 시(詩)가 수록되었다. 권5에 영대정잉묵(映帶亭잉墨)으로 척독(尺牘)이다. 권6~17은 별집으로 권6에 서사(書事)‚ 권7에 종북소선(鍾北小選)으로 서(序) ·기(記) ·발(跋) ·묘갈(墓碣)‚ 권8에 방경각외전(放鷹閣?傳)‚ 권9는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장(狀) ·기 ·진향문(進香文) ·제문(祭文) ·장계(狀啓) ·서(序) ·대책(對策)‚ 권10에 엄화계수일(?畵溪蒐逸)으로 기 ·발 ·애사(哀辭) ·제문 ·서(書) ·비(碑) ·사장(祠章) ·잡저(雜著)‚ 권11∼15에 열하일기(熱河日記)‚ 권16∼17에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을 수록하였다. <사회 문화적 의의> 연암은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홍범우익서‚ 한민명전의 등 특히 그의 문학작품에 있어서는 자기 스스로를 거리를 두고 비평의 아이러니가 번득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귀농의 뜻이 있어도 그가 돌아갈 곳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장사라도 하리만큼 당시의 신분질서가 그를 방임해 두지도 않았던 것이다. 연암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비로서의 자기 임무를 발견한 것이다. 비록 손으로 노동은 하지 못할지라도 문필로써 실학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창출하고 백성의 복지를 도모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당시 농 공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선비에게 실학이 없는 탓이라고 간파한 것이다 이에 이르러 그의 근대적인 선비의식의 한 전범을 찾아볼 수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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