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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선생난고 합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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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익재선생난고 합초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1288∼1367)의 시문집이다. <개설>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1288∼1367)의 시문집이다.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는 수대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원의 간섭을 절충 조정하는데 공헌하였으며 국정의 기강을 세우기에 진력하였다. 익재는 당시 원문단의 대가들과 항형할 만한 세련된 필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가 원에 가서 당시의 문인과 학사들과 접촉하고 연마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원사의 수준을 돌파한 구김없는 사작(詞作)을 해낼 수 있었다. <역사> 익재는 ≪역옹패설≫ 4권을 자찬(自撰)하였으나 기타의 시문은‚ 선친의 문집이 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집 출판을 목표로 착실하게 수집하여 두지는 않은 형편이었다. 1363년(공민왕 12) 77세에 계자 창로와 장손 보림이 그의 시문을 수집하여 ≪익재난고≫ 10권으로 경주에서 간행하였다. 그 후 1431년(세종 13) 어명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중간하였는데 이 때에는 이미 ≪역옹패설≫과 합간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에 그의 11대손 시발이 마침 경주부윤이 되어 1590년(선조 23)에 구각의 난고와 패설에 수교를 가하고 거기에 빠진 시문을 집록하여 십유(拾遺)를 붙여서 간행하였다. 그 후 1693년(숙종 19)에 계림부에서 그의 후손들이 연보등을 보충하여 중간하였다. 본서는 이색(李穡)이 서(序)를 쓴 필사본이다.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이제현의 자는 중사‚ 호는 익재 또는 역옹이다. 그는 고려 경주인이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수위를 하고 또 병과에 뽑혔다. 22세에는 예문과 춘추관에 선입되어 이래 문서를 맡아 보았고 그 후 71세에 치사(致仕)할 때까지‚ 1351년(忠定? 3) 원에 봉사하였을 때만을 제외하고는‚ 타직에 있으면서도 양관의 직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는 수대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원의 간섭을 절충 조정하는데 공헌하였으며 국정의 기강을 세우기에 진력하였다. 그는 수사의 정승을 지내고 71세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하였다.1376년(고려 우왕 2)에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孝行錄六十三孝贊≫을 찬술하였고‚ ≪高麗編年綱目≫을 중찬하였고‚ 충렬 충선 충숙 삼조실록의 수찬에도 참획(參劃)하였다. 그는 위인이 중후하고 광명정대한 인격을 지니고 있어 대사대의를 처결하는 데 있어서도 종용부박한 태도로 임했다. 그리고 옛 법을 준수하는 데 힘쓰고 경장하기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또 당시 일반이 불교를 숭상하고 유학이 진흥되기를 염원하였다. 그러나 불가를 적극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았고 때로는 도리어 불승과 불도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압도적으로 많다 임상원은 익재의 시를 「?麗雕潤」이라 평하고 또 「綽然有開?之風」이라 하였다. 확실히 그의 시는 어두운 면은 전연 없고 그렇다고 분개하고 원통해 하지도 않다. 재학과 운치와 경험이 융화되어서 우러난 풍류조달한 아건(雅健)한 시다. 개원·천보간의 성당시의 작풍보다는「看州詩序」(1권)에서 소식에 견주는 듯한 언사를 쓴 것이라든지 종종 동파운을 쓰고는 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본다 하더라도 그가 동파시에 대해서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자앙 등과 주창한 편십을 보면 당시 원문단의 대가들과 항형할 만한 세련된 필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십 권에 수록된 익재사 53수는 한국의 장단구들 중 공전절후의 걸작이다. 그가 원에 가서 당시의 문인과 학사들과 접촉하고 연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원사의 수준을 돌파한 구김없는 사작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율에 맞는 것은 물론이고 용어나 절주에 흠잡을 데가 없다. 청 의 주효장이 강촌총서에 익재사를 원사의 하나로 편입하였을 정도다. 문장은 병·산 양체가 활달 청경하다. 「在?都上中書都堂書」를 비롯한 재원시 충선왕을 위해 당로자에게 한 서신 3편은 의기가 간절하며 정성스럽고 충의지성이 절박하게 표로되어 있다. 팔 권에 수록된 표천은 우려(偶儷)의 미를 잘 나타내고 실용문의 소임을 다 한 좋은 작품들이다. 구 권상의「忠憲?世家」와 동하의 태조이하 왕의 사찬은 그야말로 ≪고려사≫와 서로 표리할 만한 귀중한 자료임과 동시에≪패설≫에 수록된 사론수칙과 더불어 우리 사평문학에도 중요한 위치를 사지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사회문화적 의의> 문집에 수록(收錄)된 그의 시문(詩文)과 사론(史論)‚ 기타 저술은 당시의 문학(文學)‚ 유학(儒學)‚ 여·원관계사(麗·元關係史)와 고려 말기의 국내외(國內?) 사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책머리에 이색의 서와 유상이 있다. 1권에서 4권까지는 시(鳳州龍湫‚ 雪等‚ 則?陵‚ 中庵掌試後賀宴席上등)가 있고 5권에는 서(送謹齋安??赴尙州牧序 등)가 있으며 6권에는 서(在?都上中書都堂書 등)와 기(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贈謚威烈公金公行軍記 등)이 있고 7권은 비명(有元高麗國?平山文殊寺施藏經碑 등)‚ 묘지명(?順?許氏墓誌銘 등)이 있다. 8권은 표전(謝聖旨表 등)이 있고 9권은 충헌왕세가와 사찬(?祖 등)이 있으며 10권에는 장단구(沁園春將之成都 등)가 있다. 2권과 3권은 국내에서의 음영이 다소 섞여 있기는 하나‚ 재원시의 음영이 대부분이다. 첫 4권에 시가 수록되어있고 그것은 다 국내작으로 치사 후에 지은 것도 몇 수 들어 있다. 고금 각체를 다 운용하고 있으나 고금체에 걸쳐 칠언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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