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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경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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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황정경진첩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왕희지(?羲之) 해서 필첩(筆帖)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본 유물은 황희지의 작품으로 보이는 황정경(黃庭經)의 정경(正經)으로 보인다. 황정경은 왕희지(?羲之)의 작품으로 전하여지는 세해(細楷) 글씨이다. 본 유물의 이 해서를 필첩으로 만든 것이다. 황정경은 진대(晉代) 세해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구양수(歐陽修)나 미불(米)은 왕희지의 글씨가 아니라고 하나 방정근엄(方整謹嚴)하고 고의(古意)가 풍부하여 세해 모범으로는 다시없는 명적(名蹟)으로 일컬어진다. 왕희지는 동진의 서예가로 자는 일소(逸少)이고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導)의 조카이고‚ 왕광(?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之)와 함께 ‘이왕(二?)’ 또는 ‘희헌(羲?)’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江省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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