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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전수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문경향교에서 봄가을로 올리던 향사에 사용되던 제기(祭器)의 목록을 적어 놓은 책이다. <일반적 내용 및 특징> 석전은 석전제?석채(釋菜)?상정제(上丁祭)?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첫째 丁日)에 거행한다. 석전이라는 이름은 `채(菜)를 놓고(釋)‚ 폐(幣)를 올린다(?)`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채소만 놓고 지냈으나 뒤에는 고기?과일 등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다. 중국의 상대(上代)에는 선성(先聖)?선사(先師)의 제사로 발전하여 주공(周公)을 제사하다가 한(漢)나라 이후 유교가 중요시되자 공자를 제사하게 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재위 57~75)는 공자의 옛 집까지 가서 공자와 72제자를 제사한 기록이 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628년 공자를 선성(先聖)‚ 안회(顔回)를 선사(先師)라 해서 제사를 지냈다. 739년에는 공자에게 문선왕(文宣?)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명(明)나라 초기에는 대학에 묘(廟)를 설치하고 대성전(?成殿)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가 전래된 후‚ 신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파의 화상을 당나라에서 가져와 국학(國學:?學)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에서도 국자감(國子監:成均館)에 문선왕묘(문묘)를 세워 석전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의 18현을 합한 112위(位)를 봉안하여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婢)를 지급하였으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주관하였다. 지금도 성균관에서는 옛 의식대로 해마다 봄과 가을‚ 2차례씩 석전을 거행한다. 문경향교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교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1985년 8월 5일 대성전이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문경시 북쪽에 위치한 주흘산(主屹山) 자락에 있다. 원래 문경향교 건물들은 관계 문적(文籍)과 함께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 27일에 불타버렸고‚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후 중건한 것이다. 1990년 명륜당을 중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0년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하며‚ 문묘와 이에 부속된 교육기관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이다. 향교에는 교육을 담당하는 1인의 훈도가 있었다. 훈도는 교생들의 교육을 맡을 뿐만 아니라 교육 진행 상황을 매월 1회씩 문경현감인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업무도 함께 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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