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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오방재 소장 호정집 책판 (晉州 梧坊齋 所藏 ?亭集 冊版)_호정집 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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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진주 오방재 소장 호정집 책판 (晉州 梧坊齋 所藏 ?亭集 冊版)_호정집 책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5-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진주 오방재 소장 호정집 책판에 대한 설명입니다.1. 책판 현황
(1) 책판의 분량 : 46매 86장 (6매 12장 결락)
序 文 : 2매 3장 (1844년 柳致明 所撰 序文‚ 李景在 所撰 序文)
世系圖 : 1매 2장
目 錄 : 1매 2장
?宗 敎書 및 正祖 賜祭文 : 1매 2장
제1권 : 11매 21장
제2권 : 10매 20장(4매 8장 결락 : 1ㆍ2ㆍ9ㆍ10ㆍ11ㆍ12ㆍ23ㆍ24장)
제3권 : 13매 23장(1매 2장 결락 : 15ㆍ16장)
부 록 : 4매 8장
발 문 : 1매 1장 (1매 2장 결락 : 2ㆍ3장)
변무록 : 2매 4장
(2) 책판의 크기
마구리를 포함한 전체 크기 : 가로 45cm 세로 30cm
광곽의 크기 : 가로 31cm 세로 21.5cm
목판의 두께 : 약 2cm
2. 간행 경위와 그 시기
(1) 서발문 찬술자
『호정집』의 서문은 定齋 柳致明(1777-1861)과 李景在에 의해 찬술된 두 편이 있는데‚ 유치명의 서문이 앞에 위치해 있다. 유치명의 서문이 찬술된 시기는 ‘上之十年甲辰端陽節’‚ 즉 1844년 5월 5일이며‚ 이경재의 서문이 찬술된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다.
발문은 방후손 容窩 河晉賢(1776-1846)이 찬술한 것인데‚ 역시 찬술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다.
(2) 간행 경위
방후손인 容窩 河晉賢이 찬술한 『?亭集』 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아아‚ 후손이 없고 병란을 여러 차례 겪어서 남기신 문집이 흩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족인 鎭達 씨가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널리 찾아다녀서 비로소 초고를 만들었다. 또 족인 ?이 빠진 부분을 채집하여 겨우 책자를 완성하였다. [噫嗣續零替 兵 屢經 遺集散佚無傳 族人鎭達氏 旁搜博訪 肇爲草稿 又有族人? 採緝闕漏 僅成冊子]
그리고 책의 말미에 “정미(1847)년 3월에 오방재에서 간행하다. [丁未三月日梧坊齋開刊]”라는 간기가 남아 있다.
발문과 간기를 종합해 보면‚ 河鎭達에 의해 호정 하륜의 유문이 일차로 수집되어 초고가 이루어졌고‚ 그 뒤에 다시 河?에 의해 궐루된 부분이 보충되어 『호정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재 유치명과 이경재의 서문을 받고‚ 용와 하진현이 발문을 찬술하여‚ 1847년에 하륜의 묘소 아래 재숙처인 오방재에서 간행하게 된 것이다.
하진현은 송정 하수일의 주손으로 진주 사곡에 거주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남계 이갑룡의 문인으로‚ 당시 수곡과 단목에 거주하던 진양하씨 시랑공파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차원부설원록의 기록에 대한 변무록을 저술한 것 또한 하진현의 솜씨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진현이 바로 이 문집의 간행을 주도했던 인물로 보인다.
3. 입록 인물 : ?亭 河崙(1347-1416)
자는 ?臨‚ 호는 ?亭이며‚ 아버지는 允潾이다. 1360(공민왕 9)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했다. 1388년 崔瑩의 요동 정벌 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楊州에 유배당했으나‚ 그해 여름 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1391년에는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李穡·鄭?周·李崇仁·權近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곧 권근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변신을 하여 1393(태조 2)년 경기좌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鄭道傳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1394년 첨서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부친상으로 사직했다.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와의 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 측의 강경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그는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1396년에는 啓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어 1397년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계림부윤 재직 시에도 朴子安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수원에 安置되는 등 정치적 수난을 겪었다.
이에 당시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定社功臣 1등으로 晉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서서히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1400(정종 2)년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관제 개편을 주도하고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우정승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領三司事로서 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領司評府事 兼判戶曹事로서 楮貨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태종 2)년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 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誥命印章을 받아왔다. 이후 1405년 좌정승 (世子師가 되고‚ 다음해에는 重試讀券官이 되어 卞季良 등 10명을 뽑았다. 그 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등을 역임하고 1416년 70세로 致仕하여 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陵寢을 巡審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陰陽·醫術·星經·地理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文翰을 주관하여 『동국사략』『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신왕조 초기의 한양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외교정책에 능해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특히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집으로 『호정집』이 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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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분류(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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