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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옥책 正祖?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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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조옥책 正祖?冊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순조 즉위년(1800)에 정조에게 ?文成武烈 聖仁莊孝?라는 존호와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리면서 만든 어책이다. 정조(1752~1800)의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이산(李?)‚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장헌세자(莊?世子)의 아들로 어머니는 혜경궁(?慶宮) 홍씨(?氏)‚ 비(?)는 청원부원군(?原府院君) 홍시묵(?時?)의 딸 효의왕후(孝懿?后)로 조선 22대 왕(?)이다. 1759년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 10세의 나이로 가례(嘉禮)를 올렸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장헌세자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다가 뒤주 속에서 갇히어 굶어 죽는 비극의 참화를 당한 후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며‚ 1775년 연로한 영조를 대리하여 국정을 다스리다가 1776년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영조 말년부터 집권하여 오던 벽파 일당이 정조를 옹호해 온 시파를 탄핵하자 이들을 추방하였고‚ 이어 그의 즉위를 반대하고 역모를 꾀한 홍상간(?相簡)·홍인한(?麟漢)·정후겸(鄭厚謙)·윤양로(尹養老) 등을 주살‚ 유배시켰으며‚ 1777년 은전군(?全君)을 추대하려던 홍상범(?相範)을 처형하였다. 홍국영(?國榮)에게 정사를 맡겨 장헌세자를 죽게한 벽파 일당의 음모를 분쇄케 하였으나‚ 홍국영이 왕(?)의 총애를 믿고 횡포를 일삼으며 정치를 전횡하자‚ 1780년 홍국영을 전리(田里)에 추방함으로써 세도정치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정조는 부친인 장헌세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왕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여 탕평책을 정책의 신조로 하고‚ 영조의 탕평책을 계수하여 당쟁의 격화를 막는데 힘썼다. 1791년 신해사옥(辛亥邪?)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형(文衡)의 상징적인 존재로 삼고‚ 홍문관·수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정권의 핵심으로 키워나갔다. 또한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서적편찬에도 힘을 기울였고‚ 특히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제도를 신설하고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수용‚ 발전시켰다.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는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字?典則)을 반포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또한 정조의 치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서얼허통(庶孼許通)의 정책을 시행하여 새로이 대두하는 지식인을 등용함으로써 정조가 의도하는 탕평책의 추진과 문화정책을 구현하려는데 있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시대의 풍조에 청신한 격려를 주려고 하는 새로운 시책의 일환이었다. 문집으로 재전서(弘齋全書)가 있으며 능(陵)은 수원에 있는 건릉(健陵)이다. 이 옥책은 모두 16폭으로 95행에 걸쳐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상하단은 당초문이 시문된 유제도금판을 6개의 정침으로 부착시켰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ogung.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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