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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옥책 英祖?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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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영조옥책 英祖?冊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영조 16년(1740)에 영조에게 「?聖廣運 開泰基永」이라는 시호와 「英宗」라는 묘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어책이다. 영조(1694∼1776)의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軒)이다.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淡嬪) 최씨(崔氏)이다. 조선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725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으로 조선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하였다. 숙종 25년(1699) 연잉군(延?君)에 봉해졌다. 숙종의 뒤를 이어 1720년 6월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한데다가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언(正言) 이정소의 건의와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이이명(李?命) 등 노론 4대신의 강력한 주장으로 1721년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간의 정쟁으로 왕세제는 노론의 지지 기반을 잃고‚ 자신의 생명에까지 위협을 받았다. 1724년 8월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는 곧 소론의 영수인 김일경(金一鏡)‚ 남인의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고‚ 영조 1년(1725)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 사이에 다시 파쟁이 일자 영조는 노론 내의 준론파(峻論?)를 축출하고‚ 1729년에 노론과 소론 세력을 고르게 등용하였다. 이러한 탕평책이 정착되어가자 유재시용(?才是用)의 인사정책으로 전환하여 노론·소론·남인·소북의 사색을 고루 등용하였다. 그러나 1728년에는 정계에서 쫓겨난 소론측의 반발로 이인좌(李麟座)의 난이 일어났고‚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2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한을 품어온 윤지(尹志) 등이 주동하여 나주 괘서 사건을 일으켰다. 1762년에는 소론이 장헌세자(莊?世子)를 배경으로 하여 정권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자 이를 간파한 노론측 김한구(金漢?)‚ 홍계희(?啓禧) 등이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하여 장헌세자의 비행과 난행을 고발하여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1725년 압슬형을 폐지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또한 1725년 각 도의 제언을 수축‚ 한재에 대비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액을 초과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과세(課稅)하였다. 양역(良役)의 불균형에 따른 일반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서얼차대로 사회참여의 불균등에 의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서자도 관리로 등용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 또는 사향(私享)을 금지시켰다. 1729년에는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개량하고‚ 조총을 만들게 하여 군기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으며‚ 북방변방 및 요새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문화적으로는 실학이 발흥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영조 자신이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쳐 불렀다. 능은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이 옥책은 모두 14폭으로 67행에 걸쳐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상하단은 당초문이 시문된 유제도금판을 5개의 정침으로 부착시켰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ogung.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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