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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금보 中宗金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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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중종금보 中宗金寶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中宗 徽文昭武 欽仁誠孝 ??之寶」 1545년 인종 원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어보이다.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1488~1544)의 이름은 역(?)‚ 자는 낙천(樂?)으로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后)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성대군(晋城?君)으로 봉해졌다가 연산군 12년(1506) 반정을 통해 즉위하여 39년간 재위하였다. 왕비는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인 단경왕후(端敬?后)였으나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로써 반정에 반대했다 하여 폐위되었다. 중종 즉위 초에는 박원종 등의 공신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과정에서 각종 모반과 무고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혼란기였다. 그러나 박원종이 죽는 중종 9년 이후부터 중종은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한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여 과감한 개혁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특히 기묘사림으로 대변되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들은 단종(端宗)의 입후(立後)‚ 왕비(??) 신씨의 복위와 같은 정치적 명분의 회복이나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현량과(賢良科)의 실시‚ 경연(經筵)의 강화 등 유례가 없는 새로운 정책들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이들의 급격한 개혁정책은 기존의 기성 정치세력의 반발을 가져왔고 양자 사이의 심각한 갈등을 낳았다. 결국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계기로 사림세력들은 힘을 잃게 되었지만‚ 훈구‚척신세력 내부에서 각종 옥사가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빈발하는 왜구(倭寇)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었으며‚ 또 새로운 통치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가례(家禮)의 시행‚ 『소학(小學)』과 같은 규범서의 간행 등 성리학적 윤리의식을 고취시키려 하였고 향촌의 교화를 진작시키기 위해 향교(鄕校) 교육을 강화하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였다. 능(陵)은 정릉(靖陵)으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손잡이는 거북모양을 장식하였으며‚ 주황색 방망이 술끈을 부착시켰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ogung.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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