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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독립운동가 동엄(東?<) 정환직(鄭煥直)ㆍ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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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2013년 12월 독립운동가 동엄(東?<) 정환직(鄭煥直)ㆍ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2013년 12월 독립운동가 동엄(東?<) 정환직(鄭煥直)ㆍ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 공적개요 성 명 : 동엄(東?<) 정환직(鄭煥直)ㆍ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 생몰연도 : 정환직 1844. 5. 19. ?< 1907. 11. 16‚ 정용기 1862. 12. 13. ~ 1907. 9. 1 주요공적 ·1887 정환직이 북부도사에 제수 ·1888 의금부 금부도사 역임 ·1895 태의원 시종관 역임 ·1900 삼남관찰사ㆍ도찰사 역임 ·1905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들고 아들 정용기와 의병 투쟁을 계획 ·1906 부친 정환직의 뜻을 받든 정용기가 향리에서 산남의진을 일으킴 ·1907 정용기 대장이 영일군 죽장면 입암전투에서 전사. 정환직이 산남의진 2대대장이 되어 대일항전을 펼치던 중 피체. 영천에서 순국 훈 격 : 정환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3년)‚정용기 :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공적요약서 공적상세설명 포토갤러리 공적요약서 ◇ 동엄(東?<) 정환직(鄭煥直) ·정환직은 경북 영천(永川) 출신이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기가 과인하여 이미 12살 때 지방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887년에 북부도사(北府都事)에‚ 이듬해인 1888년 의금부의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제수되었다. ·정환직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으로 동학군 진압에 나섰다. 그 해 겨울 토포사(討捕使)를 제수 받고 황해도로 가서 구월산의 동학군을 평정한 뒤 그 공로로 태의원(?醫院) 시종관(侍從官) 직을 제수 받았다. 1899년에 삼남검찰 겸 토포사가 되어 삼남으로 내려갔다가 그 해 8월에 상경하여 시종관으로 재직하였다. ·그해 11월 20일 밤 종묘에 불이 나자 금군(禁軍)을 불러 4문을 잠그고 종묘로 가서 불길 속에서 고종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어 피신케 하였다. 1900년에 원수부위임(元帥府?任) 겸 삼남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겨울 도찰사(都察使)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일제의 국권침탈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시세를 비관하고 사직을 청하니 황제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하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1905년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상의한 후 그에게 향리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명해 놓고‚ 자신은 서울로 재차 올라와 관직을 물러난 동지들과 협력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오대산(五臺山)으로 보내서 의진에 합세한 후 고종황제를 모시고 탈출하여한 후 재차 서울로 진공하여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용기가 이끄는 의병진의 북상계획이 늦어지므로 정환직은 1907년 9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1907년 9월 1일(양력 10월 7일) 아들 정용기가 입암(立岩)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永川守備隊)를 맞아 격렬히 싸우다 일본군 총탄에 전사하니 아버지 정환직이 스스로 대장이 되어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고 진영을 재편성하였다. 이 후 10월에 흥해(興涇)‚ 11월에 신녕(新寧)‚ 의흥(義興)‚ 청송군(靑松郡) 유전(楡田)‚ 흥해‚ 12월에 영덕(盈德)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7년 12월 경주로 이동하려던 중 영덕군 소택(小澤)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포위당하자 이튿날 청하군(?河郡) 각전(角田)에서 의진을 해산하고 각자 개별로 강릉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동대산(東?山)으로 갔다가 다시 내려와 일본군에 항쟁하려다 12월 11일 새벽 고천(高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은 그를 대구로 이송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음에 다시 영천(永川)으로 호송하여 영천 남교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의 장남이다. 천성이 활달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정의로운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또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 등으로 구국계몽운동에 노력하였다. 특히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행위를 규탄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과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 등 국가가 처한 위기에 대한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 문사(文詞)를 발표하여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05년 고종황제의 밀명(密命)을 받은 아버지 정환직의 명을 받은 뒤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으로 북상(北上)할 것을 결심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와 이한구(李韓久) 등과 함께 힘을 모아 각지에 통유문(通諭文)과 권고문을 발송하는 한편‚ 각종 통고문‚ 격문‚ 청조문(請助文)‚ 고시문(告示文)‚ 격고문 등으로 군사를 모집하고‚ 아울러 관리들의 반성과 민중의 분기를 촉구하였다. ·1906년 각지에서 모여든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대장에 오른 후‚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진호를 내걸고 관동으로 북상하던 중 우각리(牛角里)를 경유할 때 쯤 부친이 서울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의병진을 중군장 이한구에게 맡기고 경주로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었던 까닭에 북상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고종황제의 특명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환직은 아들이 석방된 후 고향으로 내려와 재차 의거하여 내년 5월까지는 강릉으로 진군하도록 지시하고 상경하였다. ·정용기는 자신이 체포되어 있던 동안 의병진이 이미 해산되었고‚ 여기다가 신병까지 생겼던 까닭으로 계획이 늦어졌다. 1907년 4월‚ 비로소 의병을 모집하여 북동대산(北東?山)으로 들어가 4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재기하였다. 영덕(盈德)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청하읍(?河邑)을 공격하고‚ 청송(靑松) 신성(薪城)‚ 영천 자양(紫陽)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10월에 일본군이 대거 내습한다는 척후병의 보고에 따라 대장 정용기는 막작령(幕雀嶺)에 군사를 잠복시켜 일본군을 함몰시킬 작전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내습하였을 때 후군(後軍)의 실수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이한구ㆍ손영각(孫永?)ㆍ권규섭(權?燮) 등과 함께 정용기 대장도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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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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