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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독립운동가 영주(令州) 김상덕(金尙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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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2012년 12월 독립운동가 영주(令州) 김상덕(金尙德)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2012년 12월 독립운동가 영주(令州) 김상덕(金尙德) 공적개요 성 명 : 영주(令州) 김상덕(金尙德)‚ 고령 생몰연도 : 1891~1950 주요공적 - 1919년 2·8독립선언서 국내 홍보 - 1927년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 선전책임위원 - 1933년 중국정부와 교섭‚ 대일한중연합전선 결성 - 1942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정부승인 의안제출‚ 외교활동 훈 격 : 건국훈장 독립장(1990년) 공적요약서 공적상세설명 포토갤러리 공적요약서 김상덕(金尙德)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가 펼친 독립운동은 2.8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부터 해방되던 1945년까지 무려 27년이나 되지만‚ 6·25전쟁 당시 북한으로 납치되어 끌려가는 바람에 그의 항일 독립운동은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는 1891년 12월 10일 고령군 고령읍 저전리에서 태어났다. 1917년 3월 경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였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에 동경 유학생들은 한국 문제를 상정하기 위해 나섰으니‚ 그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이다. 김상덕이 독립운동에 발을 내디딘 출발점이 바로 2ㆍ8독립선언이었다. 김상덕은 이 거사를 추진할 실행위원 10명에 속했고‚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동경 주재 각국 외교관‚ 일본 정부 대신‚ 의회‚ 언론기관 등에 보냈다. 이어서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했다가‚ 그를 비롯한 집행위원 10명 모두가 일본 경찰에 붙들렸고‚ 김상덕은 1년 정도 갇혀 지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김상덕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상해에서 펼친 그의 활동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현 국회에 해당)에서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둘째‚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고 결의하는 데 동참하였다. 셋째‚ 그는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규모인 국민대표회의에 경상북도 대표로 참가하였다. 넷째‚ 그는 1924년에 조직된 상해청년동맹의 주역이 되었고‚ 이 무렵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김상덕은 1926년 만주로 활동지를 옮겨갔다. 윤자영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하고 그 본부를 영안현 영고탑에 두게 되자‚ 김상덕은 남만·북만·동만으로 나뉜 지역 가운데 반석현을 중심으로 남만지역의 총책을 맡았다. 또한 그는 김동삼이 이끌던 정의부에 참가하고‚ 좌우합작운동인 유일당운동(唯一黨運動)에도 앞장섰다.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을 거쳐 한국독립당(만주)에 참가하였다. 1933년 김상덕은 남경으로 이동하였다. 한국독립당(만주)은 남경에서 갓 창당되었던 한국혁명당과 1934년에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만들었다. 홍진이 당수에 선임되고‚ 김상덕은 신익희·윤기섭과 더불어 상무위원으로 뽑혔다. 다시 한 해 뒤에 남경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이 이루어져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김상덕도 여기에 합류하였고‚ 광복을 맞을 때까지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중경에 도착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방향을 바꾸어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김상덕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오늘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어 의정활동에 참가하였다. 1943년에는 학무부 차장(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이 되고‚ 1945년 광복 무렵에는 문화부장(현 문화관광부 장관에 해당)이 되었다. 11월 23일 김구·김규식과 함께 김포공항에 내릴 때 그의 직책이 바로 문화부장이었다. 전반적으로 그의 활동은 차분한 느낌을 준다. 1920년대 중반에 사회주의를 수용했지만‚ 극좌적인 성향을 보이거나 우파와 갈등을 빚은 일이 없었다. 이성을 잃지 않는 그의 이미지는 광복 이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는 데도 적절하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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