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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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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우웅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우웅 호 : 숙부/동강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동강 선생의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 호는 동강 또는 직봉포의‚ 고려의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 용비의 후손으로 절제자 문절공 용초의 7대손이요‚ 삼척부사를 지낸 칠봉 김희삼의 네째 아들로 1540년(중종 35년)‚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에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년)‚ 19살에 진사가 되고 1567년(명종 22년)‚ 28살 때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보직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1572년(선조 5년)‚ 흥문관정자로 입시하여 임금으로서 흥학의 마음 가짐을 극진히 강론하여 왕의 총애와 예우를 받아 수찬‚ 응교를 역임했다. 1573년(선조 6년)‚ 대제학 김귀영에 의해 김효원‚ 허봉‚ 홍적과 함께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한 뒤‚ 경연관이 되고‚ 직제학‚ 삼사(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양관(홍문관‚ 예문관)‚ 제학을 거쳐 예·이·형조참판‚ 1588년(선조 21년)‚ 안동부사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것을 정사의 근본으로 하여 선정을 베푸니 안동부민은 선생이 떠난 후 사모하여 추사불망비를 세웠으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이 반란을 일으켜 반역하니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로 연루‚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어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내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이 풀려 의주행재소로 가서 부호군‚ 병조참판‚ 한성부좌윤‚ 대사성‚ 대사헌‚ 교정청당상‚ 동지경연사‚ 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 벼슬을 내놓고 인천으로 물러나니 따르는 학자의 무리가 많았다. 1601년(선조 34년)‚ 청주의 송곡으로 옮겼는데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선조 36년) 11월에 돌아가니 향년 64세였다.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 회령으로 유배되었다가 1592년 귀양이 풀릴 때까지의 3년을 선생은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그 대표작이 속강목 15권으로 그 각판은 고향인 대가면 사도실 청천서원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집 10권과 경연강의 등 저서가 있고 옥당으로 있을 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 존심양성잠을 짓고 귀양에서 풀려 의주 행재소에 가서 병조참판으로 복직되어 비어가무칠조를 지어 올렸다. 선생이 부수찬으로 입시하였을 때‚ 선조께서 학행이 뛰어난 인재를 묻기에 동향 친구요‚ 학행이 걸출한 한강 정구를 천거하여 선조께서 한강을 불러보시고 한강을 출사하게 하였으며‚ 1583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병조판서 이이(율곡)의 직무상 과실을 탄핵하다가 유배된 박근원(평안도 강계로 유배)‚ 송응개(함경도 회령으로 유배)‚ 허봉(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등의 원지 유배가 과중함을 영의정 노수신과 함께 주청하여 구하였다. 1589년‚ 최영경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무고를 입고 정철의 국문을 받다가 억울하게 옥사한 것을 대사헌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신원하게 하는 동시 좌의정 윤두수‚ 우의정 유홍이 용렬‚ 무능하고 사리사욕을 탐하며‚ 정철이 어진 사람을 죄로 얽어 죽인 것을 논박하여 벼슬에서 쫓겨나게 하고‚ 1589년(선조 31년)‚ 류성룡이 영의정으로서 무고를 입어 장차 불측한 화를 입게 된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남의 억울한 일에는 발벗고 나서서 해명하는 그였지만 정작 자신의 일에는 지극히 담담하고 호방하였다. 하루는 금오랑이 갑자기 회령에 들어닥치니 "선생에게 죄를 더하여 사약이 내렸나 보다."고 회령부중이 발칵 뒤집혔는데도 선생은 그저 태연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평양‚ 의주로 몽진(임금의 피난)하게 되어 선생의 귀양을 풀어준다는 기쁜 소식을 금오랑이 전하여 내려 온 것인데 함경도의 회령 땅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조차 감감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603년 11월‚ 선생이 돌아가자 조정에서 선생에게 호성공신으로 이조판서‚ 대제학을 증직하고 숙종 때 문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행장은 동향 친구 한강 정구가 기록하고‚ 그 끝에 장현광이 덧붙여서 행적과 선생의 기개를 더 적어 넣었으며‚ 신도비는 선생의 무덤이 있는 대가면 옥하동 능골마을 입구에 세워졌는데 이조판서 갈암 이현일이 글을 짓고‚ 영의정 미수 허목이 전서를 썼으며‚ 비를 얹은 커다란 돌 거북은 울산서 운반한 돌로 깍은 것이다. 성주의 청천서원과 회연서원‚ 회령의 오산서원‚ 청주의 봉계서원‚ 경성의 함지서원‚ 종성의 동강사에 제향되었으며‚ 특히 청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동짓달 열 나흘날 군내 전 유림 및 기관장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서원 옆에는 선생의 가묘가 있고‚ 서원 앞 서고에는 속강목 10권과 문집 5권의 각판(배나무를 소금 물에 삶아 글을 새긴 것)이 있다. 참고자료 : 성산지‚ 한국인명대사전‚ 성주대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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