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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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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인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인준 활동시기 : 미상 상세설명 김인준(金仁俊)에 대한 기록은 인물편에도 없고 노인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한국 국사사전과 진단학회 발간 한국사를 참고하여 조사해 본 결과 영주가 고향인 이 사람은 송도에 가서 권력을 쥔 다음 김준(金俊)으로 개명하여 행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씨 일문이 정원을 장악하고 있을 때‚ 최항(崔沆)이 정권을 잡은지 8년만인 1257년(고종 44년) 중서평(中書令)이란 높은 자리에서 병으로 죽으니 그의 종으로 있다가 첩이 된 여인의 소생인 최의가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나이가 적고 현명하지 못하며 옳지 못한 말을 잘 듣고‚ 또 시기심이 많아 간사한 무리들을 사랑하고 재물을 탐내어 인심을 크게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의를 쫓아 내려는 음모가 집권 1년만인 1258년(고종 45년) 3월에 실력행사를 할 수 있는 무장들에 의하여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중 최항의 종으로서 술을 잘 마시고 활쏘기를 잘하며 총명하여 주인의 추천에 의하여 별장(別將)까지 된 김인준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최 의의 심복인 최양백(崔良伯)‚ 이일휴(李日休)등을 죽이고 야별초(?別抄)를 시켜 의를 습격하여 목을 베이고 또 그의 일당을 잡아 죽인 후 대사성 유경 등과 더불어 정권을 고종에게 바쳤다. 이렇게 최씨를 제거하고 왕정을 봉환(?還)한 김인준은 그공으로 개국백(開國伯) 식읍 1‚000호‚ 식실봉 100호에 봉함을 받고 또 그 후 시중(侍中)의 직과 해양후(涇陽候)의 작(爵)을 받았다. 대이적인 대몽정책(對蒙政策)에 있어서 그는 최씨를 방불케 했다. 먼저 그 일례를 들면 1264년(원종 5년)에 몽고에서 왕이 직접 북경으로 와서 문안을 드리라는 문제에 대해 제상회의가 열린적이 있다. 이때 이장용(李藏用)이 왕이 직접 나아가 뵙게되면 화친하는 것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많은 사람이 죽게된다 하였다. 이때 김인준은 왕의 신변을 걱정하여 입조(入朝)를 반대하다가 이장용이 반드시 무사하도록 하겠다는 말을 듣고 왕으로 하여금 입조하시도록 하였다. 이것이 우리 국사상 전례를 깨뜨린 하나의 비애였다. 또 1268년(원종 9년)에 이장용이 몽고의 독촉에 의하여 육지로 나와 옛 도읍으로 돌아갈 목적으로 출배도감(出排都監)을 옛 서울에 설치하려고 했을 때 김인준과 그의 일당은 좋아하지 않고 반대의 태도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장용이 여름에는 송도서 겨울에는 도로 강화 서울로 돌아간다는 양도제의 절충안을 제시하여 마침내 그 도감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김인준 일파는 역시 마지 못한 태도였다. 김인준의 항몽태도(抗蒙態度)의 가장 두드러지고 대담한 것은 무엇보다도 동년(원종9년) 3월에 몽고 임금으로부터 김인준 부자와 그의 동생 충(庶)을 강제로 북경에 오라는 사자가 왔을 때 그는 사자를 모살(謀殺)하려고 하던 사건이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김인중 일당은 이 부름에 대하여 의심과 겁을 품었다. 그리하여 김인준의 일파인 장군 차송우(車松佑)의 말에 의하여 몽고 사신을 모살하고 해도(涇島)로 깊숙이 도피하려고 하여 이를 원종에게 건백(建白)하였던 바 허락하지 않았고 이를 조정회의에 문의하였으나 모두 실색(?色)이 그것은 옳지 못한 계교라는 것을 충(沖)에게 극언하여 몽사 모살을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저지시켰으나 김인중의 항몽태도는 갈수록 더해 갔다. 이런 관계로 원종은 김인중이 힘으로 출세할 때 그와 함께 최의를 죽여 위사공신이 된 임연(林衍)은 그후 김인준과 사이가 좋지 못하던 중 왕이 인준을 꺼려함을 알고 환자(宦者) 김경(金鏡)등과 모의하여 김인준 형제를 타살하고 야별초를 보내어 인준의 아들과 그 일당을 모두 없애 버렸다.?주가 고향인 이 사람은 송도에 가서 권력을 쥔 다음 김준(金俊)으로 개명하여 행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씨 일문이 정원을 장악하고 있을 때‚ 최항(崔沆)이 정권을 잡은지 8년만인 1257년(고종 44년) 중서평(中書令)이란 높은 자리에서 병으로 죽으니 그의 종으로 있다가 첩이 된 여인의 소생인 최의가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나이가 적고 현명하지 못하며 옳지 못한 말을 잘 듣고‚ 또 시기심이 많아 간사한 무리들을 사랑하고 재물을 탐내어 인심을 크게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의를 쫓아 내려는 음모가 집권 1년만인 고종 45년3월에 실력행사를 할 수 있는 무장들에 의하여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중 최항의 종으로서 술을 잘 마시고 활쏘기를 잘하며 총명하여 주인의 추천에 의하여 별장(別將)까지 된 김인준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최 의의 심복인 최양백(崔良伯)‚ 이일휴(李日休)등을 죽이고 야별초(?別抄)를 시켜 의를 습격하여 목을 베이고 또 그의 일당을 잡아 죽인 후 대사성 유경 등과 더불어 정권을 고종에게 바쳤다. 이렇게 최씨를 제거하고 왕정을 봉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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