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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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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박귀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귀희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국악발전에 모든 것을 던지고 떠난 여류명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가야금 병창하면 고 박귀희 선생을 떠올린다. 중요 무형 문화재 23호 가야금 병창 기능보유자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던 박귀희는 1921년 경북 칠곡에서 출생하였고‚ 1993년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과 이별을 고할 때까지 우리 근현대 국악사에 빠지지 않는 국악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본명은 오계화.> 원래는 인동장씨로 대구 지역의 대표 명문인 장택상 가문의 출신이기도 한 박귀희는 술도가를 운영했던 칠곡지방의 갑부 장병관과 박금영씨 사이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서출이라는 우여곡절로 인해 어머니 박금영의 성씨를 따랐다. (이러한 사연은 선생의 사생활임으로 생략하기로 한다) 하지만 유아기는 장씨 가문이 상주하던 칠곡에서 자라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보통학교에 입학할 무렵 대구로 옮겨온 박귀희는 봉산동의 외가에서 기숙하며 보통학교를 다녔다. 그의 호적이 대구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녀의 국악 인생은 대구 보통학교 시절인 열네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가는 길‚ 오포동 골목에 위치해 있었던 한 국악 교습소에서 어린 소녀들이 소리 공부하는 것을 보고‚ 등너머로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또래 아이들이 선생이 선창하는데로 소리를 따라하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나고 좋았십니더. 그래서 가만 가만 따라했지." 어느 날은 학교도 빼먹으며 소리공부에 빠지기 시작한 어린 박귀희는 어느날‚ 자신도 저만큼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반년정도가 지났을까‚ 교습소를 운영하던 손광재선생은 그를 발견하고 소리를 해보라고 말한다. 기회였다. 그는 그동안 귀로 얻어들은 [산악이 잠형하고~]와 [만고강산]이라는 단가를 불렀다. 소리를 들은 손광재 선생은 깜짝 놀라 물었다. "너 어디서 소리공부했니?" "여기서 했십니더" "욘석이 도둑공부했네 그려." 일찌감치 그의 소질을 알아차린 선생은 박귀희의 집에 찾아와 본격적인 국악공부 할 것을 권했고‚ 우여곡절 끝에 박귀희의 소리 인생은 이렇게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그녀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일제강점시기의 전설적인 여류명창인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이 대구 공연차 손광재의 국악 교습소를 방문한다. 그리고 어린 박귀희가 이화중선의 눈에 들어온다. 박귀희는 다음날 이화중선의 손에 이끌려 대구극장에서 첫데뷔 무대를 갖게된다. 이 첫무대는 일약 소녀 명창의 출연을 예고했고‚ 이후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에 합류하여 전국을 순회하게 된다. 하지만 손광재 선생에 배운 짧은 토막 소리는 그녀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가극단 생활을 일년여 정도 하고 난 다음해‚ 그녀는 명창 조학진을 찾아갔고‚ 지금의 대구 용연사에 여름 한철동안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운다. 그리고 그녀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그의 영원한 동료이자 선배인 김소희와 함께 전설적인 명창이며 월북한 소릿꾼 박동실을 찾아가 [흥보가]와[심청가] 배우게 된다. 스물한 살 때에는 하동 쌍계사에서 임방울 명창과 함께 유성준 명창에게서 [수궁가]를 배우며 판소리 다섯마당을 떼게 된다. 그녀가 가야금과 인연을 맺은 것은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인 열다섯살 무렵이다. 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명인인 강태홍에게 사사받았고‚ 열아홉살에 이르러 가야금 병창의 명인인 오태석을 만나 삼년여 동안 가야금 병창을 배우게 된다. 박귀희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가 처음에 가야금 병창을 배우면서 남들 눈에 띌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당시에 가야금 병창을 하는 국악인은 대개가 목이 꺽인 사람들이나 배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배운 가야금 병창은 훗날 가야금 병창의 독보적인 존재로 가야금 병창 무형 문화재로 지정될 줄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여성국극의 전설이 되어> 그러나 박귀희는 젊은 시절‚ 가야금 병창보다도 소릿꾼으로써 명성을 얻고 싶었다. 그 결과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당대를 풍미하던 여성 국극의 효시인 '여성 국악동우회'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박록주‚ 김소희‚ 김여란‚ 임유앵‚ 임춘앵‚ 김경희 등과 함께 뜻을 모아 서울 시공관에서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로 막을 올렸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듬해 두번째 작품으로 김아부 작 [달님 해님]으로 막을 올려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여성국극은 비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장르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박귀희가 햇님왕자‚ 김소희가 달님공주‚ 박록주가 햇님 아버지‚ 정유색이 여왕 역을 맡았던 이 공연은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루웠다. 공연때마다 여성들이 몰려들어 남장배우 박귀희를 만나려고 성화를 부렸고 그때마다 박귀희는 변장을 하여 극장 밖으로 빠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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