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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박대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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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박대춘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대춘 호 : 명언/명산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873년(고종 계유년) 상세설명 자(字)는 명언(明彦)이요 호는 명산(明山)이니‚ 함양(咸陽) 박씨 시조의 26세손이요‚ 직강전적찰방(直講典籍察訪) 박 시태(朴 時泰) 선생의 6세손이며‚ 박 종록(朴 鍾錄) 선생의 셋째 아들로서‚ 1873년(高宗癸酉) 석보면 화매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상(氣像)이 비범하고‚ 국량이 넓고 재주가 있어서 한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애국심이 강하였다. 소년시절에 영해에서 신돌석(申乭石)과 같은 서당에서 공부한 막역지간(莫逆之間)이었다. 그래서 두 소년이 서로 힘을 겨루기도 했었다. 1895년 왜적이 국모(國母)를 시해(弑害)하고 주권을 빼앗아 내정(內政)을 간섭하므로‚ 이듬해에 영남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장군은 피끓는 가슴을 억누를 길 없어 떨치고 일어나 김도현(金道鉉)‚ 신돌석(申乭石)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때에 소모장(召募將) 책임을 맡았었다. 김도현 의병대장과 함께 상주와 강릉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패전하고 일월산으로 퇴진하여 군비를 간추리던 중에‚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詔勅)이 내려 눈물을 머금고 해산(解散)하였다. 그러나 다시 망국조약인 을사조약(1905년)으로 나라 안이 물끓듯하고‚ 의병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그 이듬 해에 300여 명의 의병 중‚ 신돌석 의병대장 다음인 중군장(中軍將)이라는 무거운 책임으로‚ 영양‚ 진보‚ 영해에 침입한 일본 수비대(守備隊)를 격파하다가‚ 1907년(隆熙元年)‚ 170여 명의 1지대(支隊)를 거느리고 왜적의 영양경무분파소(英陽警務分?所)를 습격하여‚ 무기와 군량을 뺏은 것을 비롯하여‚ 영덕을 거쳐 영해경무분서를 습격했으며‚ 청송‚ 평해‚ 울진의 적을 무찌르고 일월산과 백암산과 명동산을 근거지(根據地)로 한 전투에서 승전을 거듭하였다. 1907년 6월‚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뒷산에서 접전할 때는 밤중인데‚ 우리 의병은 모두가 흰옷 차림이라 적군의 눈에 띄이기 쉬우므로‚ 모든 의병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옷을 벗고 몸을 위장(僞裝)하여 약간의 총도 있었지만‚ 창과 칼을 들고 돌격하여 적병을 찌르고 베어 죽이는 백병전(白兵戰)을 벌려 크게 승전(勝戰)하였다. 그 후에 영천(永川)을 거쳐 대구 팔공산(八公山)에서 전투하다가‚ 불행히 부하 7명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잡혀‚ 1908년 1월 안동 경무 분서(警務分署)로 이송(移送)되었다가 다시 대구 재판소로 넘겨졌다. 이른바 강도라는 죄명으로 15년형을 선고하자‚ 장군은 재판관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벽력같은 음성으로 "이놈아 우리 나라를 뺏은 너희 놈들이 강도이지 어찌 내 나라를 찾겠다는 내가 강도냐?"하고 꾸짖어 왜적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하였다.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 1912년 일본 대정 천황 즉위(卽位)로 경사라 하여 5년 감형 특사 되어‚ 1912년 2월 21일자로 출옥하였다. 그 때는 이미 일제(日帝)의 완전 통치하에 있을 뿐 아니라‚ 신 돌석 장군은 참혹한 최후을 마쳤다는 사실을 듣고‚ 너무 비통하여 무덤 앞에 가서 목놓아 통곡하며 "우리 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어느 누구와 의논한단 말인가?"하고 안타까워‚ 그 해 11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여러 동지들을 만나 독립 운동을 전개하면서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 같은 이들을 만나 협의하고 다시 상해로 가서 활약하였다. 군정서(軍政서)의 지령을 받아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띄고 1919년(己未) 5월 목수처럼 꾸며‚ 나라 안에 숨어들어 와서 동지들을 찾아 다니며‚ 군자금 모집 및 독립 사상을 고취하며 지하 운동을 펴는 중에 불행히 왜경에 탐지되고 말았다. 곧 영양읍 무창 2동 김성일 댁에서 옛 동지이며 의병 시절에 많은 협조를 해준 조 용언‚ 신유원과 함께 모여서 왜적의 만행(蠻行)과‚ 우리 애국 투사들이 나라 안팎에서 독립 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는 중에 신 해구(申 涇九)라는 자가 마음이 변해 왜경의 앞잡이로 찾아와‚ 장군을 체포하려는 순간 가졌던 서류와 수첩을 화로에 불태우고‚ 그 화로를 신 해구의 얼굴에 집어던진 후 몸에 지녔던 독약(비상)을 먹고 자결하니‚ 진실로 장렬한 순절(殉節)이었다. 향년(享年)이 47세이다. 박 대춘(朴 帶春) 장군은 용맹한 의장(義將)이었으며‚ 나라 사랑 일편단심인 충의열사(忠義烈士)로서 만인(萬人)의 귀감이다. 1977년 독립유공건국포상을 받았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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