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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박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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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박영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영서 호 : 효원/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자는 효원‚ 본관은 순천‚ 가권의 후손‚ 의민공 이현의 아들로 수륜면 윤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여 동리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자라면서 더욱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고 성품 또한 의리에 밝고 담력이 대단하였다. 1602년(선조 35년)‚ 무과에 급제하여 승의랑으로 옥구현감을 거쳐 창성부사가 되었다. 그는 백성들을 잘 다스려 왕께서 관복과 띠를 내렸으며 강 건너 여진족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는 일이 없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영변에 가 있게 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했다. 막강한 군대와 탁월한 작전으로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자‚ 임금 인조는 공주로 피난‚ 이괄은 서울을 무혈점령했다. 이 때‚ 장군은 선봉장이 되어 황해도 황주 신교까지 쫓아와서 싸움을 하였으나 첫 번 싸움에서 관군의 남이흥‚ 정충신의 양쪽 군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장군의 군사도 무너져 사태가 급하고 군사를 재정비할 겨를도 없이‚ 장군은 단기로 적진에 돌진‚ 수많은 적을 베었으나 아깝게도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괄은 평소부터 장군의 용맹을 부러워하던 차라 자기편이 되어 주면 반란이 성공한 후에 많은 은상과 병조판서를 주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성난 눈을 횃불같이 부릅뜨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내어 자기 말의 목을 쳤다. 적은 장군의 충성된 마음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닫고‚ 장군을 기둥에 묶어 놓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하나하나 뽑고 큰 칼로 살을 베어 내어 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온 몸을 피투성이가 되게 하였다. 장군은 전신에 피를 흘리고 기진맥진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목숨이 끊어졌다. 반란이 평정되자 인조임금은 장군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그 고을에서 제사지내게 했다. 그 뒤‚ 영조 때에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수륜의 덕봉사와 순천 세덕사에 제향되었다. 무덤은 성주 수륜면 수륜동에 있다. *참고자료 : 성산지‚ 성주대관‚ 한국인명대사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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