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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주(朴漢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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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박한주(朴漢柱)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한주(朴漢柱) 호 : 우졸재(迂拙齋)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밀성(密城) 시대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으로 휘는 한주(漢柱)요. 자는 천지(?支)이고 호는 우졸재 또는 우졸자라 하였으며 본관은 밀성(密城)으로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의 9세손이며 행산 박세균(杏山 朴世均)선생의 현손이고 박신보(朴臣輔)선생의 손자요‚ 박돈인(朴敦仁)선생의 아들로 청도군 풍각면 차산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나이 6‚7세에 이미 시문을 지었고 성장함에 따라 불의를 보지 못하는 강개한 마음과 대절이 있었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하에서 힘써 수학하여 학문이 크게 이루어졌다. 1485년(성종 16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이 해에 또다시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 등을 거쳐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있을 때 그 치적(治積)이 빛났다 한다. 연산군 때 간관(諫官)에 오르게 되자‚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 하면서 말하기를 "종묘사릉(宗廟社陵)에 친히 제사를 모시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요" 하니 연산군이 말하기를 안질이 나빠서 모시지 못했다." 하니 또 다시 말씀드리기를 "후원은 용봉(龍鳳)의 막을 치고 연락의 장소가 됨은 무슨 까닭이오" 하니 연산군이 불쾌한 안색으로 말하기를 "민으로서 무슨 상관이냐" 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또 말씀드리기를 "이것이 모두 민력에서 나온 소비이겠소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이어 노사신(盧?愼)‚ 임사홍(林士?) 등의 간악함을 탄핵한 끝에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인으로 몰려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 )‚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임희재(任熙載)‚ 강백진(?伯?)‚ 이계맹(李繼孟)‚ 강혼(?渾) 등 여러 선생과 같이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문도로서 붕당을 맺어 서로 칭찬하며 혹은 국정을 기롱하고 시사를 비방하였다 하여 선생은 장형 80대에 평안북도 벽동(碧潼)에 유배되고 봉수정로간(烽遂庭爐干)의 역군을 시키도록 하라는 왕명에 의해 형을 받았다. 선생은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원년)의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되어 복직되고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었으며 1537년(중종 32년)에 청도군 각북면 남산동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 향사되고 이어 함안(咸安)의 덕암서원(德巖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뒤에 풍각면 흑석동의 석강서원(石岡書院)에 향사되었다. 선생의 출생지이며 성장지인 풍각면 차산동의 남부초등학교 뒤 구릉에 여표비(閭表碑)가 건립되어 있고 차산서원(車山書院)에는 선생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있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도주지‚ 해동야인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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