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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배시량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배시량 호 : 자명/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공은 성산 배씨 충·효·열의 삼강지가(三綱之家)에서 참판(參判) 흥립(興立)의 아들로 1604(선조 37)년 8월 19일에 태어났고 자는 자명이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무예를 익혀 1630(인조 8)년 무과 장원(武科 壯元) 급제 후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에 이르러 1635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상중(喪中)에 있을 때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임금의 명을 받고 즉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민영(閔泳)의 군문에 종군하여 민영이 패사하자 그를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 전공을 세웠다. 1638년 이후 숙천부사(肅川府使)·경상좌도 우후(慶尙左道 虞侯)를 거쳐 양주목사(楊州木絲)‚ 1645(인조 23)년 공청도 병마절도사(公?道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646년 유탁(柳濯)의 반란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영국공신 일등(寧國功臣一等)에 오르고 또한 충훈부(忠勳府)에 기록되었다. 1651(효종 2)년 당상 선전관이 되고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고 임금을 뵈었을 때‚ "각 고을의 형세(形勢)야말로 국토방위와 직결되는데도 절진(節鎭)을 도리어 경시하고 심지어 부임하길 꺼려하니 경이야말로 최선을 다해 달라."고 간곡한 효종(孝宗)의 부탁을 받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북벌(北伐)하여 병자호란의 국치(國?)를 씻으려는 효종의 뜻을 받들어 부임지에 나아가 전심 전력 국방에 헌신하였으며 민폐를 덜어주고 나만 못한 종족(宗族)을 지성껏 보살피어 보는 이가 모두 그 결백하고 우애로움에 감탄했다 한다. 언젠가는 그 어머니가 이미 분배된 재산(장군은 아버지 흥립 장군의 만년에 얻은 아들이라)을 다시 재분배하려 내외 자손을 불러모았을 때‚ "내게 딸린 재물 외는 아버지의 청덕(?德)으로 끼치신 것인데‚ 이제 와 자손이 되어 그 많고 적음을 계산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 아버지의 높은 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니 모였던 사람이 다 그 지성에 감동하고 부끄러워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공은 1656(효종 7)년 가선대부(嘉善??)에 오르고 도총부 부총관(都摠府 副摠官)을 거쳐 1657(효종 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 각 고을을 순시하다 장수현(長水縣)에 이르러 죽으니 그때 나이 54세였다. 효종은 큰 재목을 잃었음을 애통해 하여 삼도감사열읍수령(三道監司列邑守令)에게 명하여 호상(?喪)하게 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했다. 묘소는 파주 동면 무건리 수좌동에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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