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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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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성람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성람 호 : 사열/청죽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창녕 상세설명 자는 사열(士?) 호는 청죽(聽竹)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관찰사 세평(世平)의 아들이며 영(泳)이 그의 동생이다. 천거로 좌랑‚ 현감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도학군자라는 평을 받았다. 1589년(선조 22년)에 그는 사회의 나쁜 폐단을 적어 임금에게 올렸다. 1.하늘을 공경하여 재앙을 없앨 것. 2.기강을 세워서 벼슬아치들을 바로 잡을것. 3.제물을 아껴서 나라의 근본을 굳힐 것. 4.받는 것을 줄여서 백성의 힘을 늦추게 할 것. 5.걱정없을 때에 방비하여 나라의 안전을 도모할 것. 6.도의를 밝혀 절의를 기를 것. 7.왕자를 가르쳐 끝없이 편안히 할 것. 8.신의를 밝혀서 백성의 뜻을 안정시킬 것. 위의 8개항을 건의하여 나라 걱정도 함께 하였다. 죽기 전에 아래와 같은 유훈을 남기기도 했다. 1.마음은 효제충신(孝梯忠信)을 주로 할 것. 2.행실은 삼가고 묵묵하게 처세할 것. 3.벗의 과실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 것. 4.가정에서는 사소한 말을 마음에 두지 말 것. "이것을 꼭 실행하고 종신토록 잊지 말게 하면 내 죽더라고 살아있는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주 운계(雲溪)서원과 창녕 물계(勿溪)서원에 향사지낸다. 그는 특히 존애당이라는 사설 의료기관을 세워 지방민을 구료하기에 온힘을 기울였다. 현재 청리면 유리가 그곳이다. "사람의 벼의 종류가 4백이 넘도록 많아 약은 한 두 가지도 갖추지 못하여 비명에 죽는 일이 자주 있으니 공은 도학 공부도 깊고 의술에도 통달하니 공의 마음은 보살의 마음과 같아서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을 보고도 막연히 바라 보고만 있겠는가? 여러 동지들과 약재를 사서 급히 쓰일 것에 대비하고져 하니 병을 진찰하고 약을 쓰는 일은 공의일이 아니오." 친구 정 경세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기꺼이 찬성하였다. 여러 친구들도 이 일에 기 꺼이 힘쓰기로 약속하였다. 이의 주동한 인물은 이 준‚ 정 경세‚ 성 람 세 사람이었다. 국내에서 나는 재료는 여유있고 여가있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캐고 모았다. 쌀과 베를 내어서 약재를 수입하였고 창고도 지었다. 환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숙박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집을 지어 환자와 나그네가 기다릴수 있는 곳을 마련하였다. 약을 팔아서 그 원가를 보충하였다. 그리고 모든 약재들을 갖추어 언제든지 환자의 요구에 응하였다. 송나라 선비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의말을 따서 이 의료기관을 존애당이라 하였다. 이것이 군자의 갖는 마음이며 존애당 현판을 붙인 까닭이다. 존애당을 세운 취지가 대략 위와 같았다. 이리하여 존애당에서는 병을 치료하고 나그네가 머물게 하고 약재도 사고 팔기도 하였다. 이것은 관립(官立)이 아니고 사설(私設)이었다. 의료 시설이 부족하여 병든 사람이 비명에 죽어가는 일이 많았던 그 때에 이 시설은 상주고을 백성에게 도움이 많았고 또한 다른 지방에 대해서도 큰자랑 이었다. 처음에는 존애당이라 했다가 존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운영은 각 문중에서 계를 모아 했다. 계원은 성(成)‚ 송(宋)‚ 김(氷山金)‚ 우(禹)‚ 윤(尹)‚ 김‚정(鄭)‚ 강(康)‚ 이(전주李)‚ 이씨 등 11문중이나 되었다. 후에 대계(??)로 분계(分?)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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