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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긍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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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손긍훈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손긍훈 활동시기 : 통일신라시대 상세설명 손 대장군의 휘는 손긍훈(孫兢訓)이요 밀성 손씨(密城 孫氏)의 중조로서 밀성군(密城郡: 당시는 광리군) 남정촌(南亭村_에서 태어났다.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을 방어하여 많은 위훈을 남겼다. 신라 호국승 원광국사가 국권 왕세를 확산시키기 위해 복국우세지장으로 세운 대작갑사(?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신라인 귀산(貴山)과 추항( 項)등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킨 전통적 사상교육장을 보위하는 한편 호국연병을 위해 수많은 군병을 거느리고 김식희 전위장군(金式希 前衛將軍)과 함께 대작갑사에 상시 주둔 하였다. 수 십만명(數十萬名)의 광막한 평지인 장군평(將軍坪)에 연병장을 만들어 장군석(將軍石)을 세우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칼싸움을 닦아 임전태세(臨戰態勢)를 다졌다. 운문사는 단순한 종교를 목적한 것만의 사찰이 아니다. 불교호국철학(世俗五戒)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사상 계도의 연마 도장으로 활성화시켜 지금의 사관학교(士官學校)와 같은 연병장으로 활용한 사적이 뚜렷하다. 말하자면 신라 지방군벌(新羅 地方軍閥)의 본산(本山)이다. 고로 대작갑사(?鵲岬寺)에는 역대로 원광(圓光)‚ 보양(寶壤)‚ 원응(圓應)등 삼국사(三國師)가 거처 하였는데 손 대장군(孫 ?將軍)은 주로 보양국사(寶壤國師)를 모시고 무술을 닦으면서 수 백차례에 걸친 비적들의 침공을 막아 사찰과 도장을 보위함으로써 운문산의 수호신이 되어 쇠잔해진 신라를 보위한 위훈으로 왕의 칙명에 따라 지금도 장군의 영정(影幀)이 운문사 조영전에 봉안되어 해마다 음력 9월 9일에 향사 하고 있다. 손 대장군은 김 전위장군(前衛將軍)을 앞세워 도보로 송도(松都: 開城)까지 걸어 고려왕 왕건(高麗? ?建)을 찾아가 신라를 무찌른 후백제를 함께 때려 부수자고 간청했다. 당시 후백제에는 자중지란이 일어나 견훤(甄萱)의 아들 사형제가 짜고 애비를 몰아낸 후 넷째 아들 신검(神劍)을 왕위에 올려놓았던 때다. 명분과 실리에 왕건이 친히 나서 손 대장군의 지휘하에 1만5천 여명의 기마병을 주어 남으로 후백제를 쳤다. 황산군(黃山郡:지금의 連山軍)에서 후백제왕 신검(後百濟? 神劍)을 생포하고 여라 연합군은 후백제군을 파죽지세로 억누르고 혁혁한 전과을 올려 후백제를 정복하였고 935년(신라 경순왕 9년‚ 고려 태조18년)에 신라마져 국권을 바쳐 고려가 마침내 삼국(三國)을 통일하고 말았다. 손긍훈(孫兢訓) 대장군은 신라의 원수 후백제를 쳐부수고 고려 삼국통일을 이룩한 공훈으로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으며 아울러 정 1품 보국숭록대부(正一品 輔國崇祿??)에 오르고 삼중대광 사도(三重?匡 司徒)에 추증 되었다. 19대손 운계 손정현(雲溪 孫正鉉)은 신원동에 운계정(雲溪亭)을 세워 손 대장군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손 대장군의 후손들은 밀양(密陽)‚ 대구(?邱)‚ 청도(?道)‚ 창녕(昌寧)등지에서 대족(?族)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손 대장군이 신라말기에 진성여왕(眞聖女?)이 실덕하여 괴귀(?鬼)가 횡행하게 되고 사람이 많이 죽어 인심이 흉흉해지자 이 괴귀들을 몰아내어 해중으로 쫓아 버리고 경내를 편안케 하였다는 사화도 있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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