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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황(申益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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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신익황(申益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신익황(申益愰) 호 : 명중/극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자는 명중(明中) 호는 극재(克齋) 평산인(平山人)이며‚ 성리학자(?理學者)다. 공(公)은 1672년 윤 7월 14일 약목(若木)에서 태어났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성품(?品)호탕하여 매사에 얽매이지 않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국내(國內)의 명승지(名勝地)를 두루 탐방하여 안목(眼目)을 넓히고‚ 호연지기(?然之氣)를 길렀다. 공(公)은 갈암 이현일(葛庵 李?逸)의 문인(門人)으로 일찍이 학문(學問)에 뜻을 두고 경전(經傳) 자사(子史) 잡지(雜誌) 패설(稗說)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섭렵(??)하여 통달(通達)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또 이기설(理氣說)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성리학(?理學)에 일가(一家)를 이루는 한편 많은 선현(先賢)들의 서원(書院)을 찾아 참배하고 그들을 본받고자 하였다. 공은 1696년 자주 닥치는 가뭄과 수재와 또 미풍간속(美風艮俗)이 허물어져 감을 그냥 볼수가 없어 재난을 만난 민생(民生)을 구휼(救?)하고‚ 미풍간속(美風艮俗)을 진작시킬 목적으로 이곳 약목에 주자(朱子)의 학문전통(學問傳統)을 본받아 사창수계(社倉修 )를 창설(創說)하였다. 그리고 5년 후인 1701년에 창건(創建)된 사창(社倉)은 상하(上下)가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당호(堂號)를 동락당(同樂堂)이라 하였다. 동락당이 완성되자 사창(社倉)의 기능은 시작되었다. 사창의 기능과 업무는 재난을 만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는 봄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며‚ 또 노제(老?)에 힘쓰고 예의(禮儀)를 익히고 기강을 밝혀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는 사람을 골라 3월과 9월에 술을 대접하고 그 공적을 높이 칭송하였다. 또 사단칠정(四端七?)과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분별함을 함께 논(論)하기도 하였다. 공은 갈암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 성리학(?理學)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정견(定見)을 세울 수 있었고‚ 공의 나이 32세때 제유인심도심급사단칠정동의총변(諸儒人心道心及四端七?同意總辨)을 지었다. 공은 학문(學問)에 전념하면서 거처하는 당호(堂號)를 극재(克齋)라 하였다. 학문(學問)의 성취는 극기(克己)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믿고 당호를 극재라 이름하였는데 뒷날에는 공의 호가 되었다. 34세 때는 운곡도산휘음(雲谷陶山徽音)을 편성하였다. 1710년에는 가숙잡훈(家塾雜訓)을 만들고‚ 이듬해에는 학문의 근본은 주일(主一無適의 준말‚ 곧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잡념을 버리는 일이며‚ 정주(程朱) 이후에 송유(宋儒)의 수양설임)이라 생각하고 주일잠(主一箴)을 만들었다. 공이 만든 주일잠의 내용은 서불숙주일가숙(書不熟主一可熟)이요‚ 심부존주일가존(心不存主一可存)이다. 이는 곧 글의 내용을 알지 못할 때는 마음을 집중하면 그 뜻을 알게되‚ 마음이 온전하지 못할 때는 잡념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한 곳에 집중하면 온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군자(君子)의 학문하는 도(道)를 밝힌 것이요‚ 마음 가짐을 가르친 것이다. 공의 나이 41세 되던 해인 1712년 국내(國內)의 승지(勝地)를 두루 둘러보고 남긴 글을 모은 동국승경와유록(東國勝境臥遊錄)을 완성하였다. 공은 42세에 세마(?馬)로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또 46세 가을 선무랑의영고주부(宣務郞義盈庫主簿)로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 그때 공은 대대로 식록을 받는 집안사람으로 여러번 조종의 부름을 받고 나가지 않는 것은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입권하여 사은숙배하고 그날로 바로 집으로 돌아와 다시는 세상사(世上事)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선현(先賢)들의 글을 모아 학문연구(學問硏究)에만 몰두하였다. 서울을 다녀온 다음해 성리휘언(?理諱言)을 지으니 책이 20권이나 되었다. 이책의 내용(內容)은 위로는 천인성명(?人?命)과 이(理)와 기(氣)의 심오한 진리(眞理)로부터 아래로는 왕도(?道)와 패도(覇道) 이적(?狄) 이단잡학(異端雜學) 까지 총망라된 불후의 명작(名作)이다. 특히 20권에는 잡학과 이단만을 기술(記述)하였으니 당시의 고루하고 편협하기만 하던 유학자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또 공의 만년인 49세에 지은 이기성정통간도(理氣??通看圖)는 인심(人心) 도심(道心) 사단 칠정(四端七?) 및 이기(理氣)에 대한 깊은 연구서로 성리학자(?理學者)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주는 저서(著書)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문하(門下)와 유림들이 사당을 지어 불천위(不遷位)로 지금까지 모시고 있으며‚ 약목면 복성동 양촌(陽村)에 있는 사당앞에 갈암의 박회손(?會孫)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또 공의 아들 이 귀(貴)하게 되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司憲)으로 추정되고‚ 지금은 훼철된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었다.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당호(堂號)를 동락당(同樂堂)이라 하였다. 동락당이 완성되자 사창(社倉)의 기능은 시작되었다. 사창의 기능과 업무는 재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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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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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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