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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안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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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안병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안병규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1891년 2월 7일 경산읍 삼남동에서 의관 안영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농업에 의한 한 민족의 경제 진흥과 서구 문명에 의한 선진 일본의 신문명을 흡수하기 위하여 일찌기 일본에 건너가서 효오고현립 농업학교를 수학하였다. 경산군 농회 부회장‚ 경산 연초경작 조합장‚ 경산 금융조합장‚ 경산 수리조합장 등‚ 주로 농업과 관계되는 단체에 관여하여 아직도 농민의 수준이 몽매하였던 일정 때 선구적인 지도 역할을 다하였다. 경제 분야 활동에서 항상 일본인에게 뒤지기를 꺼려 했다. 대구 동촌 지구에서 대구 능금의 본고장으로 일본인이 과수원을 경영하자 재빨리 경산에 능금 농사를 시도하여 대구능금의 본고장이 경산이라고 칭하게 하는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경산주조주식회사(1928년 7월 28일 경산읍 중방동 378에 설립) 사장직에 종신토록 재임하였는데‚ 원래 이 회사가 일인 아지로가 다수 주식소유자로서 사장이었는데 끈기있게 도전하여 일인을 추출하였다. 또 1943년 태평양 전쟁 당시 경산 최초의 흥행시설 주식회사 경산극장을 창립하였다. 해방 후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에 따라 소유하던 농지가 모두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그 당시 일시에 농지를 잃은 과거의 지주들이 대부분 몰락하였지만 그는 그의 끊임없는 근면과 높은 식견과 노력으로 시련을 극복하였다. 그러니 흔히들 지방에서 경제박사라고 칭찬하였다. 오직 매사에 신중 숙고하고‚ 근검 절약하는 불굴의 정신력의 소산이었다. 그는 항상 법을 존중하였다. 법을 어긴 경제활동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의 사람됨은 타인에게 한결같이 친절 정녕하였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다. 사치와 유흥이란 그의 사전에는 없었을 것이다. 70세가 넘어도 쉬는 일이 없었으니 경산번영회장으로 다년간 재임하면서 향토 발전에 지력하였고‚ 1966년에 경산군립 도서관을 설립하는데 부지 405평을 희사하였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로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그의 방명은 군립도서관에 새겨져 길이 남을 것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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