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안증

추천0 조회수 88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안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안증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494년 출 생 지 : 밀양시 초동면 금포리 상세설명 완구(?舊) 안증(安 )선생은 성종(成宗)이 승하하던 1494년 아버지 안구(安 )의 둘째 아들로 밀양시 초동면 금포리(密陽郡初同面金?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글을 깨우칠 정도로 영리하여 당시의 대 선비인 박한주(朴漢柱)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박한주선생이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고 탐오와 파당으로 횡포를 자행하는 임사홍 등은 탄핵하다가 능지처참을 당하기 이전끼지만 해도 10여세의 선생에게 학문을 닦고 덕을 쌓아 나라의 재목이 되라는 격려의 서신이 있었으니 선생의 조숙한 학문은 그때부터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 후 어지러운 정치 현실과 박 한주선생의 참형이 어린 가슴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하였고 결국 선생으로 하여금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학문에만 심취하게 하였다. 아버지가 김종직에게 배운 탓으로 그의 학통을 이어 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쓰는 한편 청년 학자인 선생은 청년이 되면서부터 학문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회재 이언적(李彦迪)‚ 남명 조식(曺植)등과 친교를 맺으며 왕도정치에 의한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주창하였다.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고‚ 형조좌랑(形曹左郞)을 봉직 받은 것이 1540년이다. 그 해 다시 세자 시강원 사서설서(司書說書)로 승진하여 후일 인종이 된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특히 경상도에 은거하면서 전렴한 역학과 정사의 민본사상은 인종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선생은 조정 조신들이 목민과 정사는 외면하고 세력 형성에 급습하여 마치 관료들만의 세상처럼 부패한 것을 통탄하고 인종이 즉위하면 반드시 이상정치를 펼 것이라고 믿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상 강론에 몰두하였다. 인종이 즉위한지 일 연도 못되어 승하하고 왕실 외척들의 세력 다툼으로 야기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은 피로 얼룩진 현장을 목격하고 더 이상 관계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몇 해동안 인종과는 깊은 정이 들었으며 기대 또한 큰 것이었는데 모든 것이 허물오잔 곳이다.그 길로 사직하고 전기한 바와 같이 영천구 도남동에 은거하여 향리의 젊은 선비들을 불러들여 후학의 양성에 전력하다가 1553년 향년 60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성리정본(?理精本)‚ 민본치요(民本治要)‚ 조관치절(朝官治節)등 6권의 필본 저서를 남겼으나 불행하게도 6.25사면 때 소실되었다. 후일 순암 (順庵)선생은 아조(我朝)에서는 고결한 선비라고 극찬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